연휴가 겹친 지난주 말 고교동창 S가 서울을 다녀갔다. 서초동 재수전문 학원에서 책과 씨름하는 아들, 그를 뒷바라지하는 집사람을 보러 온 것이다. S는 자식을 외국 보낼 처지가 안 돼 강남 오피스텔에 마누라와 자식을 보낸 이른바 '참새 아빠'다. 서울 사는 기자로서는 괜스레 미안한 생각에 "너 미쳤냐"고 딴죽을 걸 맘이 꿀떡 같았지만 시골서 제아무리 용써봐야 용 안 된다는 하소연에 입밖에 꺼내지도 못했다.
술잔이 몇 순배 돌자 학창시절 이야기가 나왔다. 꽤 오래 전 일이지만 기자가 다녔던 중소도시의 D고교는 1984학년도 대학입시에서 시쳇말로 일을 냈다. 그 해 SKY에 입학한 동창이 100명에 가까웠다. 이중 60%는 서울대에 들어갔다. 당시 예체능고교를 제외하곤 전국 1위 성적이다. 모교가 뭐 그리 대단히 특출한 고교도 아니었다. 고교 평준화 이전엔 지방마다 도시이름을 딴 공립 명문고가 있었는데 D고교는 1차에 낙방하면 입학하는 곳이었다. 그런데 고교 평준화 이후 사정은 달라졌다. 무엇보다 억지로라도 공부시키려는 선생님들의 열의가 학교평판을 바꿔놓았다. 요즘 말로 '닥치고 열공'외에는 길이 없다던 은사님의 기억이 새롭다. 수업시간 엎드려 자는 교실붕괴는 상상할 수도 없었거니와 그랬다간 먼지 나도록 얻어터졌다.
30년 가까이 흐른 지금 모교에서는 상위 10%에 들어야 서울소재 대학에 들어갈까 말까라고 한다. 이른바 '이해찬 시대'를 거쳐 주저앉더니만 수시다 입학사정관이다 뭐다 해서 대입제도가 복잡해지더니만 쫄딱 망가져 버렸다.
비단 모교뿐이랴. 부모의 경제력이 자식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학력까지 결정하는 게 지금의 세상사다. S의 말마따나 용궁에서 용 난다고 믿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왜 이 지경이 됐는지를 한두 가지로 설명할 수 없지만 지방에서 예비고사 또는 학력고사를 치른 4050세대들은 복잡한 대학입시를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현행 입시제도는 심각한 구성의 오류에 빠졌다. 제도 하나하나 뜯어보면 수긍할 만한데 전체를 놓고 보면 치명적인 결함을 드러내고 있다. 전인교육이니 창의성과 잠재력 발굴, 대학 선택권 확대 같은 것들은 구구절절이 옳다. 그런데 취지 좋은 것을 모아놓다 보니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지 모를 정도로 꼬여버린 게 작금의 입시제도다.
대학가는 방법은 다양하다 못해 난해하기까지 하다. 전형 가짓수만도 3,000개가 넘는다. 그러니 닥치고 열공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전략이다. 난수표 전형을 뚫으려면 학습 포트폴리오부터 짜야 한다. 수능과 내신 중심의 정시, 스펙 위주에 논술이 가미된 수시를 대비하려면 가용자원을 적절히 안분해야 하는 것이다. 리스크는 최소화하고 효율성은 극대화하는 게 요체다. 이는 정보력과 분석력ㆍ판단력 차이가 우열을 가른다. 일찌감치 입시전략을 수립한 뒤 하나씩 스펙을 쌓지 않으면 도무지 따라갈 수 없다. 지방에선 언감생심이다. 자기주도학습이 엄마지도학습, 정확히 말해 사교육의존학습으로 변질되지 않으면 그것이 되레 비정상이다.
구성의 오류를 극복하는 길은 단순화에 있다. 과유불급차원을 넘어선 전형 가짓수를 싹둑 잘라내고 수시비중도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 서울대가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런데도 서울대는 2014학년도 수시모집 비중을 82%로 늘렸다. 수시비중이 사실상 가장 높다. 이것도 모자라 예체능도 중시하겠다고 한다. 입시를 더 꼬아놓은 격이다. 농어촌특별전형 같은 보완장치가 있지만 정공법이 못 된다.
창의성과 잠재력 발굴, 특기적성, 전인교육 다 좋다. 세태가 달라졌다곤 하나 개천에서 용이 나는 가장 넓고도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길은 대학 문을 뚫는 것이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데 정보력이 왜 관건이 되고 무슨 투자하는 것도 아닌데 포트폴리오 따위가 왜 필요하단 말인가. 때마침 반값 등록금제도가 도입됐다. 가난해도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 건 좋지만 용 나기 점점 어려운 개천 환경이라면 무슨 소용인가. 올 여름쯤 입시제도 개편안을 내놓을 교육당국이 또 어떻게 꼬아놓을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