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금이 충분한 대형 증권사가 중소기업ㆍ혁신기업을 인수하거나 사모투자펀드(PEF)를 통해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창조경제 형성의 첫 단추입니다."
우리나라 자본시장 싱크탱크의 수장은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육성이 성공하기 위한 조건으로 주저 없이 대형 투자은행(IB) 육성을 꼽았다. 자본시장과 실물경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위험감수 능력을 가진 대형 증권사들의 역할이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14일 서울 여의도 자본시장연구원 집무실에서 만나 김형태(51ㆍ사진) 자본시장연구원장은 자본시장법 개정안의 발목이 국회에 잡혀 있는 상황에 대한 아쉬움을 나타냈다.
논리는 단순하고 명료하다. 김 원장은 '위험총량 불변의 법칙'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그는 "한 국가의 경제가 짊어지고 가야 할 위험의 총량은 정해져 있고 국가재정ㆍ자본시장ㆍ기업들의 흡수 부담에 차이가 있을 뿐"이라며 "국가 경제의 버팀목인 중소기업 시장은 상대적으로 위험성이 크므로 효율적 의사결정으로 위험을 감내할 수 있는 자본시장이 담당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설명했다.
고위험ㆍ고수익 시장이므로 제한된 금리에 묶여 있는 은행이 위험을 감수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또 중소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힌 정부 입장에서도 국가 재정을 무한정 늘릴 수 없는 노릇이다.
김 원장은 "창조기술ㆍ창조산업은 제조업과는 전혀 다른 시장으로 자금이 투입되는 관점에서는 트랙레코드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힌다"며 "과거 데이터를 통한 위험 분석, 수익성 분석이 불가능한 상황에서는 정보 불균형과 도덕적 해이 등의 부작용이 나타날 개연성이 크므로 가격 논리가 작용하는 자본시장을 통해 자금이 돌아가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말했다.
대형 IB가 필요한 것도 같은 논리. 자본금은 물론 분석력과 위험감수 능력을 보유한 대형 증권사들이 적극적으로 돈줄 역할을 해야 시장이 활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위험이 큰 만큼 수익성도 클 것으로 기대되지만 중소형 증권사들이 중소기업에 직접 투자하기 힘든 것은 자본금이 충분하지 못해 자칫 망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라며 "대형 IB의 경우 자본금이 충분히 넉넉한 만큼 높은 수익성을 위해 위험을 감내할 여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초기 기업에 대해 대형 증권사들이 직접 투자하고 또 일부 실패한 기업들이 나올 경우 구조조정과 인수합병(M&A)을 단행하는 등 중소기업 시장 전반적으로 자금이 환류되는 생태계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대형 IB 육성안을 담고 있는 자본시장법개정안의 국회 통과 필요성을 지적했다.
김 원장은 상반기 내 개설될 코넥스 시장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코넥스 시장을 초등학교 저학년에 비유했다. 김 원장은 "그동안 우리나라 중소기업 정책의 가장 큰 문제점은 초등학교 5ㆍ6학년, 쉽게 말해 성정 궤도에 진입한 기업들에만 돈이 들어갔다는 점"이라며 "정작 당장 '자금'이라는 젖줄이 필요한 1ㆍ2학년(초기 기업)에 대한 지원이나 관리는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코넥스 시장의 핵심적인 역할은 이들 초기 기업들에 투자한 엔젤투자자나 벤처기업들의 자금 회수처"라며 "이들이 수익을 포함한 투자금을 회수해 다시 초기 기업에 투자하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결국 산업의 자금이 돌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 원장은 "투자자 입장에서는 기업을 상장시켜 수익을 얻을 수 있어야 자금을 공급할 수 있는데 과거에 비해 상장 문턱이 한 층 높아진 코스닥 시장에는 혁신 기업이 상장하기 힘들어 희망이 멀어졌다"며 "투자자의 희망을 좀 더 가까이 가져다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코넥스 시장은 '희망 시장'이라고 볼 수 있다"고 풀어냈다.
코스닥 시장은 이제 중학교 역할을 해야 한다고 김 원장은 설명한다. 그러나 단순히 고등학교(유가증권시장)로 올라가기 위한 단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김 원장은 코스닥 시장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곧바로 산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는 직업학교 형태에 가까워야 한다고 강조하며 미국의 나스닥 시장을 예로 들었다.
"미국의 뉴욕증권거래소(NYSE)와 나스닥은 서로 다른 성격을 갖고 경쟁하는 공존 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나스닥에 상장된 대표 기업들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ㆍ구글ㆍ페이스북 등으로 NYSE의 대형주들보다 오히려 몸집이 더 큰 곳들도 많지만 절대 옮겨갈 생각을 하지 않죠. 우리나라의 코스닥 시장도 IT 중심 시장, 혹은 창조기업 시장 등으로 유가증권시장과 다른 정체성을 명확히 세워야 서로 다른 성격의 자금이 시장에 원활히 공급될 수 있습니다."
김 원장은 코스닥 시장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첫 단계로 상장과 퇴출 기준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투자자뿐 아니라 상장사의 입장에서도 시장의 신뢰성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우리나라에 맨유나 챌시 등의 클럽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K리그가 아닌 프리미어리그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메이저리그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초기에는 힘들겠지만 시장의 품격을 높이는 노력이 필수적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코스닥 시장은 IT붐 붕괴로 인한 추락으로 급격한 변동성을 경험했고 테마주, 주가조작 등 불공정거래의 온상이라는 부정적 인식이 여전히 자리잡고 있다"며 "시장이 발전하려면 좋은 기업, 성장하는 기업들을 끌어들여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수질개선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어 "투자자들 입에서 '기업이 이 정도 수준은 돼야 코스닥 시장에 상장될 수 있구나'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이미지 쇄신 노력이 있어야 성장성을 갖춘 우량 기업들이 들어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 원장은 현재 우리나라 증권업계는 위탁매매수수료만 가지고 돈을 벌기 힘든 단계에 진입했다고 진단했다. 60개가 넘는 증권사가 치열한 경쟁을 벌인 결과 수수료는 바닥 수준으로 떨어졌다. 여기에 기관을 중심으로 한 장기 투자 흐름이 이어질 수 밖에 없는 환경 하에서는 거래량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김 원장은 "국내 증권사의 절반 이상이 위탁매매수수료에 의존하는 사업 구조를 가지고 있다"며 "위탁매매수수료가 10년 전에 비해 절반 이하로 떨어진 상황에서 현재와 같은 구조 하에서는 증권업계의 침체가 불가피하다"고 진단했다.
결국 증권사들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새로운 먹거리를 발굴해내야 한다. 그는 "개인투자자들의 투자 행태가 직접투자에서 간접투자, 크게 보면 자산관리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증권사들은 '지금 어려운 상황만 넘어가면 다시 거래량이 늘어나 괜찮아 지겠지' 하는 생각을 빨리 버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어 "최근 수수료 경쟁으로 어려워졌다고 하지만 상장지수펀드(ETF)의 성장성은 여전히 유효하고 또 단군 이래 최대의 히트 상품으로 꼽히는 주가연계증권(ELS)에 대한 수요도 이어지고 있다"며 "증권사들은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 등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쪽으로 사업 방향을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자본에는 국경 없어… 연구지평 넓힐 것 조민규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