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7월12일] 제너럴 셔먼호 사건

막무가내. 대동강 하구에 정박 중인 제너럴셔먼호는 조선의 퇴거 요구에 오히려 뱃머리를 평양으로 돌렸다. 고종 3년(1866년) 7월12일(음력)의 일이다. 길이 55m, 774톤짜리 증기상선 제너럴셔먼호의 애초 용도는 군함. 1861년 건조돼 영국과 미국 해군이 ‘프린세스 로열’이라는 이름으로 각각 2년씩 사용한 후 민간에 불하한 선박이다. 최고속도 11노트로 당시에는 가장 빨랐다. 소유주는 프레스턴. 동남아와 중국 해역에서 약탈을 일삼던 해적이다. 만경대까지 올라온 미국 배는 부녀자를 희롱하고 조선의 배를 뒤집어 교섭사절을 강에 빠뜨려 죽이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제너럴셔먼호가 교섭차 방문한 조선 관리를 억류한 채 석방조건으로 쌀 1,000섬과 금과 은ㆍ인삼을 요구하자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는 무력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장마로 불어났던 강물이 빠져 배가 모래톱에 걸린 상황. 평양 관민은 24일 조각배를 이용한 화공으로 제너럴셔먼호를 불태웠다. 권총과 칼을 차고 복음을 전하겠다던 영국인 선교사 토머스와 덴마크인 선장을 포함, 선원 23명 전원이 죽었다. 조선인도 5명이 죽고 7명이 다쳤다. 제너럴셔먼호 사건은 위대한 승리였지만 조선을 쇄국의 외길로 내몰았다. 자주적 근대화의 기회도 놓쳤다. 더욱 아쉬운 대목은 모방 생산에 실패했다는 점. 침몰한 배를 복제한 철선은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기관이 조악한데다 석탄 대신 목탄을 때 화력이 약했던 탓이다. 철선 제작에 비용 수십만냥이 지출되고 비축했던 동과 철도 바닥나자 대원군은 다시는 증기선에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제너럴셔먼호 사건 140주년. 북한의 대포동 미사일 발사로 야기된 긴장이 한반도의 하늘을 뒤덮고 일본은 박수치고 있다. 역사의 반복 가능성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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