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만 독특하게 존재하는 전세(傳貰)제도의 보편화는 지난 1960~1970년대 진행된 급격한 도시화 과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한다. 당시 일거리를 찾아 농촌에서 무작정 도시로 올라온 세입자들에게는 소를 팔거나 농지를 처분해 마련한 돈이 큰 밑천이다 보니 이 돈을 잃지 않고 주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인식되면서 전세가 보편적인 주택 임대차 유형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것이다.
제도를 놓고 이러저러한 문제점이 지적되고 있지만 여전히 전세가 주류를 이루는 데는 이유가 있다. 집주인 입장에서는 주택구매 과정에서 유용한 자금조달원이다. 전세를 끼고 집을 사게 되면 많게는 매입 비용의 60~70%까지 이자 한푼 없이 충당할 수 있는 '무이자 대출'을 받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은 일종의 저축이다. 당장 보증금을 올리는 것은 부담이고 맡겨놓은 보증금에 이자 한푼 안 붙지만 결국 조금씩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내집마련의 든든한 밑천이 된다.
이렇다 보니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선거 과정에서 핵심 주거공약 중 하나로 내세운 이른바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에 세입자들의 관심이 모일 수밖에 없다. 2년마다 찾아오는 재계약 때 수천만원에서 많게는 1억원이 넘는 보증금을 올려줘야 하는 입장에서는 반갑기 그지 없는 공약이다. 최근 이 제도의 구체적 실행 방안을 놓고 주무부처인 국토해양부 등 관계부처 직원들도 고심하는 모습이다.
'목돈 안 드는 전세' 공약은 단기 처방일 뿐
당초 당선인 측에서 내놓았던 방안은 집주인이 담보대출을 받아 인상된 전세보증금을 내주는 대신 세제혜택 등 인센티브를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방안은 최근 검토 단계에서 사실상 폐기된 것 같다. 집 구하는 세입자가 널린 마당에 굳이 자기 집을 담보로 내놓는다는 게 정서적으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탓이다.
최근 대한주택보증은 또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 등 공공기관이 집주인과 전세계약을 대신 체결하고 이를 세입자에게 저리의 월세로 재임대하는 방안이다. 이 과정에서 대한주택보증이 보증을 서게 되면 공공기관의 재정건전성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방안 역시 그리 무릎을 칠 만한 묘수는 아닌 듯하다. 굳이 전세시장의 불균형이 심각한 상황에서 부담스럽게 공공기관과 임대차 계약을 맺으려는 집주인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으로 과연 '목돈 안 드는 전세제도'자체가 가능한지도 따져볼 문제다. 급등한 전셋값 탓에 늘어난 서민들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나온 공약이지만 줄어든 세입자의 부담은 누군가 대신 떠안아야 한다. 지금까지 나온 방안들만 살펴봐도 집주인이 담보대출의 부담을 지든지, 아니면 저리로 돈을 빌려주는 공공이 일정 부분 손해를 봐야 한다. 세입자 역시 당장 목돈이 들지는 않지만 결국 꼬박꼬박 이자는 내면서 살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제도가 뛰는 전셋값을 잡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당장 어떻게 제도의 도움으로 급한 전세보증금은 올려줬지만 그렇다고 전셋값이 안정되거나 없던 전셋집이 새로 생기는 것은 아니다. 제목은 멋진데 내용을 따져보면 당장 급한 불을 끄는 미봉책일 뿐인 셈이다. 지속적일 수도 없는, 지속적이어서도 안 되는 정책인 셈이다. 자칫 사적인 거래에 공공이 개입해 시장왜곡을 확대할 우려도 제기된다.
거래 회복 안되면 전세난 더욱 심화될 것
천정부지로 뛰는 전셋값을 다잡는 근본적 해결책은 하나다. 바로 수급 불균형 해소다. 신혼부부 등 시장에는 계속 새로운 수요가 진입하는데 기존 세입자들의 매매전환은 이뤄지지 않다 보니 전세시장에만 잔뜩 수요가 몰리고 있다. 거래위축에 분양도 잘 안 되다 보니 건설사는 집을 짓지 않고 공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실정이다.
결국 전셋값 급등은 동맥경화에 빠진 거래시장이 되살아나지 않고서는 해결될 수 없는 문제다. 역으로 거래만 되살리면 굳이 인위적인 방안을 모색하지 않고서도 주택시장에서 촉발된 다양한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 새 정부에 시장이 요구하는 것은 '진통제'가 아니다. 약물치료든 수술이든 피가 돌 수 있게 좁아진 혈관을 넓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