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수장들 벗던 옷 다시 주섬주섬… "차라리 강만수 때가 그립다"

시그널 없고 소문 무성 업무·새 사업 차질 이어<br>교체작업 늦어질 가능성 우리금융에 불똥 튈수도

산업통상자원부 산하의 공공기관장들이 지난달 2일 윤상직 산업부 장관 주재로 열린 간담회에서 다소 무거운 표정으로 윤 장관의 발언을 듣고 있다. /사진제공=산업통상자원부


지난 2008년 7월 국회 공기업특위에 참석한 강만수 당시 기획재정부 장관의 목소리에는 힘이 들어갔다. 민주당의 한 의원이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 사장에 일괄 사표를 내라고 종용하지 않았느냐'고 묻자 강 전 장관은 "인사권자가 바뀌었으니 재신임을 묻는 게 좋지 않겠느냐는 것"이라고 답했다. 정권이 바뀌었고 인사권자도 바뀐 만큼 공기업 수장에 대한 일괄사표 후 재신임은 당연하다는 의미다.

당시에는 전례 없는 일이라며 곳곳에서 불만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최근 정부와 공공기관들에서는 "강 전 장관이 차라리 그립다"는 소리가 나오고 있다. 문제는 있지만 공기업수장들에게 신호는 확실히 줬다는 것이다. 공기업의 한 최고경영자(CEO)는 "새 정부가 출범하면 공기업의 CEO들은 위로부터 신호를 기다린다. 박근혜 정부는 그런 게 없다"고 말했다. 옷을 벗으려 했던 CEO나 임기를 채우려는 CEO 모두가 헷갈려 한다는 얘기다.


CEO 거취의 불확실성은 경영에까지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선이 지연되는 탓에 업무일정에도 차질을 빚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사업을 추진하는 것도 쉽지 않다. 또 다른 공기업 임원은 "신임 CEO가 올 가능성이 높은데 그때 맞춰 업무 보따리도 풀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현재는 솔직히 일상적인 업무만 한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벗던 옷 다시 걸치는 공기업 CEO=박근혜 대통령이 3월 초 국무회의에서 "(공공기관 수장 등은) 국정철학을 공유하는 사람을 임명해달라"고 발언한 뒤 A공기업의 한 CEO는 옷 벗을 마음을 굳혔다. 자리에 연연하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그는 "솔직히 신호를 기다렸다. 박 대통령의 발언수위가 높았기 때문에 청와대 등이 곧바로 움직일 것으로 예측했다"며 "하지만 그 뒤로 별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아 지금까지 자리에 있다"고 웃음을 지었다. 최근 임기가 끝나 사임을 한 공공기관 수장은 "아무런 신호가 없는데 굳이 먼저 옷을 벗지 않아도 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 임기에 대한 욕심이 없던 이들도 최근에는 '나도 채울 수 있는 것 아냐' 하는 희망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새 정부 출범 이후 당연히 옷을 벗을 것으로 봤던 CEO들의 버티기도 눈에 띈다. 전직 정부 고위 관료는 "KㆍH 등 공기업이거나 정부의 입김이 강하게 들어가는 곳의 경우 교체 가능성이 컸지만 버티고 있다"면서 "이들 자리는 민감한 곳인데다 탐내는 인사들도 많아 정리는 되겠지만 현재 분위기라면 쉽게는 안 될 듯싶다"고 말했다.

CEO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감사, 사내ㆍ사외이사의 경우 임기가 끝난 곳이 70여곳에 이르지만 CEO의 교체작업이 더뎌지면서 이들 역시 어부지리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윤창중 사태…꼬여가는 공기업 수장 인선=고위직 인사에 대한 트라우마를 갖고 있는 새 정부는 공기업 수장의 교체작업에도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 보니 CEO의 공석이 길어져도 채우지 못하는 곳이 제법 된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경우 원장이던 현오석 경제부총리가 재정부 장관으로 내정된 후 70일이 지나서야 원장공모 작업을 시작했다. 김건호 수자원공사 사장, 주강수 가스공사 사장 등은 사의를 표명했지만 사표가 수리되지 않고 있다. 4개월 전 처음으로 사의를 표명한 이채욱 전 인천국제공항공사 사장은 이미 CJ대한통운으로 자리를 옮긴 뒤 이제서야 후임자 공모작업을 시작했다. 임기가 이미 끝났거나 종료 예정인 공공기관장의 후임 인선도 중단됐다. 김문덕 서부발전 사장의 임기는 지난달 1일 종료됐지만 공식적인 후임 인선 작업을 아직도 시작하지 않고 있다. 이달 임기가 종료된 김용근 산업기술진흥원장도 공식적인 후임 인선 절차가 이미 시작돼야 했지만 전혀 일정이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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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O기관 수장은 교체 대상이 됐다고 하더라' 등 소문이 무성하면서 해당 기관으로 꼽힌 곳은 업무도 사실상 진척이 안 되고 있다. 교체될 CEO의 경우 중요한 결정도 하지 않는다. 민감한 것들은 모두 뒤로 미루는 상황이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공기업의 한 관계자는 "정기인사도 겨우 했다"고 말했다. 소문은 무성하지만 아무런 신호가 없다 보니 혼란의 연속이라는 얘기다.

더욱이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이 대통령 방미 기간 성추행 사건이 터지고 경질되자 공기업 CEO 전반의 인사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가뜩이나 인사 트라우마가 강한 청와대가 민감한 기관의 CEO를 현재의 상황에서 쉽게 앉히기도 어렵다는 얘기다. 심지어 회장인선 작업을 벌이고 있는 우리금융의 경우 '윤창중 사태'로 늦춰질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좀더 시간을 갖고 열을 식힌 뒤 공기업수장의 교체작업을 본격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청와대 대변인에 이어 홍보수석도 공석인 상황에서 공기업 수장의 교체 문제는 우선순위에서 다시 밀리지 않겠냐"라고 말했다.

이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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