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눈높이 맞추기

떼쓰는 아이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달래거나 혼내도 막무가내지만 엎드려서 아이와 눈높이를 맞춰 대화하면 바로 반응이 온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눈높이는 물리적인 눈높이 말고도 사고방식, 이해의 폭에도 존재한다. 콜레스테롤만 알고 콜레스테롤이 높은 것을 고지혈이라 지칭하는 것을 모르는 고지혈 환자에게 의사가 열심히 고지혈증 치료에 대해 설명해봤자 환자가 이해를 못하는 건 환자 탓이 아니고 의사소통에 필요한 기본 눈높이 조절이 안 된 탓이다. 이 눈높이 조절은 일상 생활에서 끊임없이 조절해야 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내가 거의 같은 내용의 강의를 할 때 대상의 눈높이에 따라 사용할 용어를 달리 선택하지 않으면 강의가 엉망이 되고 만다. 눈높이의 조절은 적응의 문제이기도 하다. 인터넷ㆍ스마트폰 등을 속도에 구애받지 않고 쓰고 살다가 인터넷이 느려서 화상통화는 생각할 수 없는 해외에 나가서 느린 인터넷에 적응을 못하는 우리는 분통이 터지지만 현지인들은 우리가 참을성 없는 사람들이라 여기는 것도 눈높이의 차이이리라. 눈높이의 조절은 생존에 필수적이기도 하다. 최근 극한상황에서 원시적인 방법으로, 자력으로 살아남기 하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왜 오락 프로그램에서 저런 짓을 할까 했는데 간빙기, 혹자는 지구 온난화라고 하는 요즘, 날씨를 보니 이 것이 필요할 수도 있겠다 싶다. 전기 끊기고 물 끊긴 마천루 촌에서 추위 혹은 더위와 싸워 살아남기, 자동차 없이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알아두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는 제작자의 눈높이와 내 눈높이가 비슷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내 능력을 과신해 눈높이를 너무 높게 두는 것도 생존력을 떨어뜨리는 것이다. 얼마 전 연평도 사건때 과거 6.25를 겪어 아신다던 할머니가 대책으로 사 들고 가던 라면 열 개, 생라면으로 드실 생각은 아니었을 텐데 그 할머니의 눈높이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개인의 눈높이뿐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사회적인 눈높이 조절의 성패는 한 사회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쇠고기 파동까지 가지 않더라도 최근 구제역이 생각 외로 잘 진압되지 않는 이유를 정부가 돼지고기 수입을 합리화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늦추기 때문이라고 믿는 기상천외한 눈높이가 분명히 존재하니, 사안의 경중을 불문하고 다양한 생각과 눈높이를 가진 국민이 같은 생각을 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사회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도 눈높이 맞추기는 누군가가 시작해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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