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이동찬 코오롱 명예회장 별세] "헐벗은 국민에 따뜻한 옷 입히자"… 섬유로 사업보국 실천

나일론 처음 들여와… 약자 보듬으며 사업 키워

경총 회장만 14년 '노사화합·안정화'에 온 힘

은퇴 후 그림에 전념… 본지 미술전 출품하기도

1978년 울산공장 준공, 고(故) 이동찬(왼쪽) 명예회장이 지난 1978년 코오롱 울산공장 준공식에 참석해 손을 들어보이고 있다. /사진제공=코오롱그룹

2003년 경총 긴급 회장단 회의, 고(故) 이동찬(가운데)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2003년 8월 롯데호텔에서 열린 한국경영자총연합회 긴급 회장단 회의에 참석해 이장한(왼쪽) 종근당 회장, 박승복(오른쪽) 샘표식품 회장 등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 /김동호기자

2006년 하나은행코오롱챔피언십 선수들과, 고(故) 이동찬(앞줄 가운데)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2006년 10월 하나은행코오롱챔피언십에 참가한 김미현(앞줄 왼쪽), 박세리(뒷줄 왼쪽) 선수들과 함께 기념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제공=코오롱그룹

2007년 창립 50돌 아들과 함께, 고(故) 이동찬(앞줄 오른쪽)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지난 2007년 4월 코오롱 구미공장에서 열린 창립 50주년 행사에서 이웅열 회장과 함께 입장하고 있다. /사진제공=코오롱그룹

은퇴 후엔 ''화백''으로…, 고(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이 화실에서 찍은 사진. 이 회장은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뒤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사진제공=코오롱그룹

8일 타계한 고(故) 이동찬 코오롱그룹 명예회장은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라는 경영철학으로 코오롱뿐만 아니라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섬유산업을 키워낸 인물이다. 부친인 고 이원만 창업주와 함께 국내에 나일론을 가장 처음 들여온 장본인이기도 하다. 코오롱(KOLON)이라는 사명도 '코리아 나일론(KOREA NYLON)'에서 나왔다.

◇국내 섬유산업의 큰 별=이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섬유업의 큰 별이다. 다른 그룹들과 비교하면 창업 1세대는 아니지만 거의 부친과 함께 사업을 해 1.5세대로 불린다.


이 명예회장은 1953년 국내에 처음으로 나일론을 들여왔다. 지난 1957년에는 부친 이원만 선대회장과 '한국나이롱주식회사'를 세웠다. '한국나이롱'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1963년부터 나일론섬유를 생산했다. 나일론은 "없어서 못 판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나일론 생산은 우리나라 섬유산업에 큰 획을 그은 사건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수출품에 나일론이 들어간 것도 이때쯤부터다.

이 명예회장이 섬유산업에 뜻을 품은 데는 광복 후의 쓰라린 기억 탓이 컸다. 1922년 4월1일 경북 영일군에서 이 선대회장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그는 15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이 선대회장은 당시 일본에서 '아사히공예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경리일을 보던 이 명예회장은 흥국상업학교 야간부에서 공부하면서 와세다대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했다.

이후 군에 입대했다가 광복 후 우리나라로 돌아온 그는 국민들의 처참한 생활과 마주하게 됐다. 이 명예회장은 "헐벗은 국민에게 따뜻한 옷을 입게 해 사회봉사와 애국을 실천하겠다"는 것을 신념으로 삼았다.


그는 1977년 삼촌이던 이원천 코오롱TNS 전 회장에 이어 코오롱의 경영권을 물려받았다. 1983년에는 고려나일론을 인수했고 1985년부터는 필름과 비디오테이프·메디컬 등으로 사업을 다각화했다. 이 명예회장은 1988년 코오롱전자를 세운 뒤 1990년 코오롱정보통신, 1994년 신세기통신을 잇달아 설립하며 코오롱의 규모를 키웠다. 1995년 12월 경영일선에서 물러나면서 외아들인 이웅열 회장에게 회사를 물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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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이 명예회장의 경영철학은 '이상은 높게 눈은 아래로'였다. 등산을 통해 터득한 교훈이었다. 이상은 높게 설정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등산식 경영을 하면서도 눈은 아래쪽을 바라보면서 임직원과 사회 약자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이 명예회장의 생각이 오롯이 담긴 말이다.

그렇다고 수비적으로 경영했던 것은 아니다. 이 명예회장은 "역경을 순경으로 극복해 오히려 위기를 찬스로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나의 생활관이자 경영철학"이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기업이 사회와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강한 사명감도 갖고 있었는데 "기업은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임직원 모두의 사회생활 터전이고 기업의 부실은 사회에 대한 배신이며 배임"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경총 회장만 14년… 말년에 그림에 몰두=이 명예회장은 1982년부터 무려 14년간 한국경영자총협회 회장을 맡았다. 아무도 하지 않으려는 자리를 자처하면서 노사문제 안정화에 기여했다. 1989년에는 경제 5단체가 참여하는 경제단체협의회를 창설했고 1990년 노사와 공익대표가 참여하는 국민경제사회협의회를 발족시켰다. 1993년에는 경총 회장으로 한국노총과의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냈고 1994년에는 '산업평화 선언'을 통해 노사협력의 기틀을 닦았다.

1983년에는 한국섬유산업연합회 회장에 취임해 '섬유백서'를 발간해 우리나라 섬유산업의 선진화에 힘쓰기도 했다. 통일 관련 민간단체인 민족통일중앙협의회의 임원으로도 활동했다. 1992년에는 기업인으로서는 처음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기도 했다.

이 명예회장은 은퇴 후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에 전념했다. 회사 경영에서 물러난 뒤 무교동 집무실 한편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렸다. 1992년 고희전(古稀展)에 이어 2001년 팔순전(八旬展), 2009년엔 미수전(米壽展)을 열었다. 주로 산과 강·바다 등 자연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초대 조직위원장을 지낼 당시 광화문의 붉은 응원 물결을 그린 작품을 정몽준 축구협회 회장에게 선물했다. 서울경제신문과의 인연도 깊어 '서경 명사 미술전'에 자신의 작품을 출품하기도 했다.

사회공헌에도 열심이었다. 자신의 호인 '우정(牛 汀)'을 따 만든 '우정선행상 시상식'은 이 명예회장이 매년 빼놓지 않고 챙기는 행사였다. 4월 열린 제14회 시상식은 그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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