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정책

[기로에 선 외환관리] <중> 짙어지는 환율 트라우마

원高 극복 못하면 日기업 전철… 고부가 상품 개발 힘 쏟아야<br>엔高에 혹독한 구조조정 일본도 결국 '돈 찍어 경기 부양' 선회<br>고환율을 실력이라 착각하는 한국, 원화강세 대응준비 제대로 안돼<br>"정부, 가파른 환율하락 조절하고 수출시장 다변화 등 서둘러야"



그땐 한국에 최악… 엄청난 위기 닥치나
[기로에 선 외환관리] 짙어지는 환율 트라우마원高 극복 못하면 日기업 전철… 고부가 상품 개발 힘 쏟아야

이연선기자 bluedash@sed.co.kr















(두번째 사진) 키코(KIKO) 피해기업 공동대책위원회 소속 중소기업 사장들이 서울 청운효자동주민센터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정부로부터 받은 훈·포장 등을 청와대에 반납하며 정부의 대책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키코 사태로 환 헤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갖게 된 중소기업들은 가파른 원화강세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다. /서울경제DB












엔高에 혹독한 구조조정 일본도 결국 '돈 찍어 경기 부양' 선회
고환율을 실력이라 착각하는 한국, 원화강세 대응준비 제대로 안돼
"정부, 가파른 환율하락 조절하고 수출시장 다변화 등 서둘러야"

전쟁에서 금리를 '소총'에 비유한다면 환율은 '대포'라 할 수 있다. 그만큼 국가경제에 미치는 후폭풍은 거세다. 글로벌 경기 침체와 동반해서 이뤄지는 양적 완화 속에서 급속하게 진행되는 원화강세는 그래서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이런 가운데 최근의 원화강세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 '슈퍼엔고'에 스러져간 일본 기업들과 흡사한 경로를 거칠 것이라는 경고가 줄줄이 나와 주목된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엔화 값 폭등에 견디지 못한 소니ㆍ파나소닉ㆍ샤프 등 일본 전자 '3총사'는 신용등급이 정크본드로 추락했다. 일본 전자업계의 몰락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엔고 현상에 따른 경쟁력 하락이 결정적이었다는 데는 이론이 없다.

신민영 LG경제연구원 경제연구부문장은 "일본이 무너진 이유는 부동산 버블, 고령화, 환율 등 3가지로 요약된다"며 "최근 몇 년간 우리나라 기업이 글로벌 시장에서 잘나갔지만 이제 환율이 그 경쟁력을 갉아먹을 것"이라고 우려했다.

◇엔고에 단련된 일본도 결국 '돈 찍자'=최근에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윤전기로 돈을 찍어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는 등 일본이 양적 완화에 나서고 있지만 그 전까지 일본은 엔고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혹독한 구조조정을 거쳐왔다. 일본이 본격적으로 엔고 현상을 받아들인 것은 지난 1985년 달러 대비 엔화 평가절상을 유도하기로 합의했던 '플라자합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일본 기업들은 엔고 현상에 적응하기 위해 해외 직접투자를 늘리고 '마른 수건 짜내기'식 구조조정을 단행하는 등 위험분산과 경쟁력 강화에 엄청난 노력을 기울였다.

일본 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거점을 꾸준히 이전한 결과 1990년 4.6%이던 해외생산 비율은 2009년 17.8%까지 대폭 높아졌다. 수출거래에서 엔화결제 비율을 높여 환율변동에 따른 원가부담을 해외로 전가하고 철저한 원가절감도 추진됐다. 2009년 도요타ㆍ닛산ㆍ혼다 등 자동차 3사가 원가절감을 통해 달성한 이익개선 효과(2,970억엔)는 엔고로 인한 영업손실(2,241억엔)을 웃돌 정도였다.

이른바 '슈퍼엔고' 현상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불거졌다. 2007년대 중반만 해도 110~120엔대이던 엔ㆍ달러 환율은 2010년 80엔대까지 떨어졌다. 엔고 현상에 적응한 일본의 상장기업은 경상이익을 금융위기 직전의 96%까지 회복하는 저력을 과시했지만 결국 일본 정부가 양적 완화를 선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구조조정에 따른 사회적 고통이 심각했다.

엔화강세는 일본 개개인의 삶에도 서서히 스며들었다. 당장 수입물가가 떨어지고 해외여행이 크게 늘기는 했다. 하지만 기업실적이 나빠지면서 고용이 줄기 시작했고 비정규직과 실업자가 늘면서 소비가 줄어드는 악순환이 나타났다. 결국 급격한 환율하락은 기업뿐 아니라 국민에게도 많은 상처를 남겼다. 김규판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일본팀장은 "수출기업의 해외진출에 따른 산업공동화 문제, 내수기업의 혹독한 구조조정과 비정규직 확대에 따른 국내 문제를 극복하기 어려웠다"며 "우리 기업도 빠른 원화가치 상승을 상당히 경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환율을 '실력'으로 착각하는 한국=일본과 비교하면 저환율 시대를 앞둔 한국의 준비상태는 상당히 심각한 상황이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오히려 고환율 정책의 최대 수혜를 입은 수출기업들은 엔고 현상으로 위축된 일본 기업의 해외시장까지 쟁탈하면서 승승장구했다. 일본 기업이 극한의 원가절감을 단행했다고 해도 한국의 환율 프리미엄을 극복하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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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이 긴 시간 이어져온 환율 시련 속에 에너지를 축적해왔다면 우리나라는 환율을 오히려 실력으로 착각하며 환율이 원상복귀할 미래에 대한 준비에 소홀했다. 구본관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일본은 환율 문제를 꾸준히 흡수해왔지만 이와 반대로 국내 기업은 환율이 시련의 크기를 완화해주는 것을 제대로 인식하지도 못했다"며 "원화강세에 따른 어려운 시기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비축했는가에 대해 상당히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원ㆍ달러 환율이 10% 하락할 경우 연간 기준으로 수출입차(수출-수입)는 50억달러, 경상수지는 70억달러 악화된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0.4%포인트 둔화되고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0.5%포인트 하락한다. 삼성경제연구소는 GDP가 0.72%포인트, 수출 증가율이 0.54%포인트, 물가 상승률이 0.7%포인트 떨어진다고 분석했다.

엔화가치가 급락하고 원화가치가 급등할 경우 우리나라 기업들의 경쟁력은 급속도로 악화될 것이 분명하다. 방어경영에 급급했던 일본 기업이 기회를 잡아 오히려 공격경영으로 돌아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환율만으로도 전세가 역전되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화강세에 대한 종합적 대응의 필요성을 깨닫고 관련 대책을 서둘러 마련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원화강세라는 보호막을 걷어낼 경우 기업과 국내 시장이 입을 충격을 다각적으로 분석해 더 이상 환율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역량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유병규 현대경제연구원 경제연구본부장은 "미국과 일본의 양적 완화 정책은 결국 자국 기업을 지원하기 위한 산업정책이나 마찬가지"라며 "정부는 거시적으로 가파른 환율하락의 속도조절에 나서는 한편 미시적으로는 기업과 협력해 수출시장 다변화와 고부가가치 상품개발에 힘을 쏟아야 한다"고 말했다.

환헤지 공포에 갇힌 중기'키코 상처' 에 환변동보험 가입조차 꺼려 결제통화 다변화 등 리스크 관리 지원을
급락하는 환율에 노출된 중소기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우리나라 경제구조를 중소기업 중심으로 전환하겠다고 밝혔지만 환율 문제를 들여다보면 중소기업의 요원한 경쟁력과 대기업ㆍ중소기업 간 불공정거래 관행은 '한국 중소기업의 현주소'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중소기업연구원에 따르면 중소기업은 현재 우리나라 전체 수출의 30%를 차지한다. 하지만 대기업에 비해 가격경쟁력이 취약하다 보니 환율에 굉장히 민감하다. 특히 섬유ㆍ의류 등 경공업 부문 수출 중소기업의 경우 가격경쟁력에 크게 의존해 환율이 하락할 경우 직격탄을 맞는다.

하지만 환율하락에 대비해 환리스크를 제대로 관리하는 기업은 많지 않다. 중소기업중앙회 설문조사에서 중소기업의 65.1%는 '여건상 환리스크 관리를 못한다'고 했다. 그나마 '수출계약시 대금결제일을 조정'하는 방식으로 관리하는 업체가 22.6%일 뿐이다. '결제통화 다변화(19.8%)' '무역보험공사 환변동보험(8.5%)' '시중은행 선물환 거래(7.5%)' 등은 비중이 낮다.

중소기업이 환리스크를 피하게만 된 데는 이유가 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원ㆍ달러 환율이 강세로 돌아서면서 통화옵션상품인 키코(KIKO)에 가입했던 중소기업들이 엄청난 손실을 입은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금융위기 이후부터 환변동보험 가입도 급감하고 있다. 무역보험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말 중소기업의 환변동보험 가입실적은 1조851억원으로 2년째 감소했다. 2년 전(2조5214억원)에 비해 반토막 났고 2008년과 비교하면 7분의1 수준이다. 무역보험공사의 한 관계자는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통화옵션상품 키코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기업들이 전혀 다른 상품인 환변동보험 가입조차 꺼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환리스크에 취약한 중소기업을 더 힘들게 하는 것은 대기업이다. 대기업이 환차손 부담을 중소기업에 전가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중기중앙회의 한 관계자는 "수출이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대기업 협력사들은 기여도에 비해 과실이 적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을 경제 중심에 두겠다는 새 정부가 들어서면 저환율 시대 수출 중소기업의 경쟁력부터 재점검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환변동보험 가입 확대, 수출입 결제통화 다변화 등 중소기업의 환리스크 관리를 체계적으로 돕는 전담창구부터 강화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환율급변으로 자금흐름이 막힐 경우 경영지원자금을 신속하게 지원 받을 수 있는 물꼬도 터야 한다.

홍성철 중기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정책당국은 수출 중소기업에 대해 환위험관리 지원을 강화하는 한편 일시적인 자금경색에 노출된 중소기업에는 수출금융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며 "장기적으로는 수출 중소기업의 환율에 일희일비하지 않도록 비가격 경쟁력을 확충할 수 있는 지원책이 뒷받침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연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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