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괴물’이 연일 한국영화사의 흥행 기록을 경신하고 있다. 영화가 산업의 일부이고 워낙 복잡한 경제구조 위에 놓인 결과라고 하지만 최근 영화 ‘괴물’에 쏟아지는 상업적 관심은 예상을 뛰어넘는 바가 있다. ‘괴물’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온통 흥행 기록에만 쏠려 있기 때문이다.
방점을 찍어야 할 부분은 바로 ‘온통’이라는 수식어이다. 영화가 산업뿐만은 아닐 텐데 수치로 환산된 몇몇 개념에만 매달리는 현재의 풍경은 여러 가지 우려를 자아낼 수밖에 없다.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이 가운데서 촉발된 사건이었다.
상업·독립영화간 불균형 심해
김기덕 감독의 발언, 그러니까 “‘괴물’은 한국 관객과 영화의 수준이 잘 만난 것이다”는 말은 김기덕 감독의 신작 ‘시간’의 시사회장에서 불거져나왔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대개 제작비 20억원 수준, 관객 동원 200만명 정도의 작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스펙터클보다는 아이디어나 철학을 통해 진행되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대중(大衆)이 아닌 소중을 위한 영화로서 선택되고 성장해왔다. 김기덕 감독을 키운 건 8할이 시스템이나 질서에서 어긋난 주변인의 감성이었던 셈이다.
어떤 점에서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대중영화와 소중영화, 그리고 대규모 상업영화와 저예산의 독립영화가 공존해야 할 한국영화의 미래에 대한 언급에 가깝다. 문제는 그 발언이 성공한 후배에 대한 열등감이나 자기 영화의 비상업성에 대한 볼멘소리 정도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중심에서 벗어난 주변부에서 공고한 질서로 굳어진 현실을 비판하는 감독으로서 김기덕의 발언은 양가적인 면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비주류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이 필연적 선택이었나 우연적 결과였느냐의 문제와도 결부된다.
김기덕과 봉준호 감독은 한국영화계에서 어떻게 한 감독이나 작가가 입신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김기덕 감독이 해외 영화제의 명성에 의해 한국영화 내부에 재진입했다면 봉준호 감독은 흥행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다시 굳힌 감독이라고 할 수 있다. 해외 영화제에서의 인정과 흥행, 이 두 가지 객관적 지표는 한국영화계에서 감독이 성장할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이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 칸영화제 집행위원장인 티에리 프레모의 말처럼 한국은 작가주의 영화가 상업영화와 융해된 희유한 영화 지형이었다. 김기덕 감독의 발언은 이 행복한 동거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저예산 영화와 대규모 블록버스터 영화의 불균형이라는 동시대 영화계의 문제가 급기야 한국 내부까지 침투한 것이다.
문제는 ‘괴물’이라는 영화가 상업적 성공을 이뤘다는 게 아니라 천만 관객이라는 객관적 수치가 절대적 가치로 상정돼버렸다는 데에 있다. 수치상의 놀라움을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괴물’은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캐릭터와 스펙터클의 창조에 성공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개방적 토론으로 공존 모색을
봉준호 감독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의 영화 언어를 전유해 한국적 특수한 장르로 재창조해내는 데 성공했다. 봉준호 감독의 성공이 ‘태극기 휘날리며’나 ‘실미도’ ‘왕의 남자’가 거쳐왔던 1,000만 관객 돌파와 구분되는 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괴물’로 인해 빚어진 상업영화와 저예산 독립영화의 마찰은 언젠가 한번 한국영화 내부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을 잠재된 문제였다. 중요한 것은 이 잠재된 문제가 영화 발전을 위한 개방적 토론으로 확대돼야 한다는 것이다.
‘괴물’은 잠재적 형태로 들끓고 있던 한국영화시장의 견고성과 미래에 대한 질문들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그러니 이제 토론은 누군가를 링 밖으로 추방하거나 쓰러뜨리는 승패가 아닌 더 나은 대안으로의 접근으로 귀결돼야 한다. 다양성이 사산된 동일성은 미명으로 치장된 획일주의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