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6월10일] 안톤 푸거


신교도 국가 견제, 황제 쟁탈전 개입, 스웨덴과 노르웨이 광산 개발. 국가나 왕실이 아니라 16세기 상인 푸거 가문의 사업들이다. 요즘의 기준으로도 어려운 일을 5세기 전에 해치운 푸거 가문은 자본주의 최초의 다국적기업으로 손꼽힌다. 푸거 가문은 바다도 넘었다. 영국을 면직ㆍ모직공업의 하청기지로 삼고 페루와 칠레를 개발하며 아프리카 흑인을 노예로 잡아 아메리카 식민지에 넘겼다.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유럽의 최강국이던 에스파냐 국왕의 면전에서 ‘전하의 오늘날도 우리 돈이 없었으면 불가능했다’고 으름장을 놓을 정도였다. 푸거가의 전성기는 3대째인 안톤 푸거(Anton Fugger)의 시대. 1493년 6월10일 태어나 삼촌 야콥 푸거 2세가 자식을 남기지 못한 채 사망한 1525년(22세) 총수 자리에 올라 사업을 국제적 규모로 키웠다. 안톤의 최대 무기는 정보. 주요 거점에 정보망을 깔고 유랑민족인 집시족을 정보원으로 활용했다. 태양광선과 거울을 이용한 광(光)통신 시스템을 구축해 똑같은 정보라도 그는 남보다 훨씬 빠르게 손에 넣었다. 장부상 최고를 기록했던 1550년의 재산은 600만 황금 굴덴. 어떤 국가나 왕보다 재산이 많았으나 1557년부터는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신대륙에서 밀려드는 금은보화도 모자랄 정도로 전쟁에 국가 재정을 투입한 에스파냐 국왕 펠리페 2세가 채무불이행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재산의 절반을 에스파냐에 대출했던 안톤은 충격에 빠져 3년 후인 1560년 세상을 떠났다. 안톤 사망 이후 푸거 가문은 2대를 넘기지 못하고 망했지만 오늘날에도 흔적은 남아 있다. 안톤의 삼촌이 1517년 지은 노동자 주택 147채가 아직도 빈민복지시설로 쓰인다. 막대한 재산은 사라졌어도 작은 선행은 영원히 남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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