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 금융

[경제청문회] 이경식씨 "97년 1월 위기 감지"

국회 경제청문회는 25일 이경식 전한국은행총재, 홍재형 전경제부총리 등 4명의 증인과 임창렬 전경제부총리 등 9명의 참고인을 각각 출석시킨 가운데 첫 증인신문을 벌였다.특위위원들은 이날 청문회에서 97년 외환위기 당시 김영삼 전대통령의 IMF구제금융 신청 결정시기와, 외환시장 대책 등을 집중추궁했다. 다음은 李 전한은총재와 특위위원들의 일문일답 요지. -한은총재로 있으면서 언제 IMF구제금융을 신청할 생각을 했는가. ▲한보사태가 터진 97년 1월말부터 위기를 느꼈으나 3, 4, 5월이 넘어가면서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기아사태가 터진 8월부터는 좀더 강하게 느꼈으며 대만과 홍콩이 평가절하하는 10월 20일께 부터는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IMF로 가야 한다는 것은 11월 3일에야 확신했다. -지난 97년 11월 10일 오후 9시 30분께 金전대통령으로부터 경제위기, 환란위기와 관련한 전화를 받은 사실이 있나. ▲내 기억으로는 12일로 생각되는데 한밤에 전화를 받아 상당히 당황했다. 金전대통령은 『요즘 주식시장도 나쁘고 이자율도 자꾸 올라가고 환율도 불안한 등 경제가 어렵다는 데 사실인가』라고 물었다. 그래서 주식시장도 상당히 어렵고 환율도 불안하고 이자율도 흔들리고 있지만, 이것보다 더 긴급한 것은 외환사정이라고 말했다. 외환사정이 극도로 나빠 잘못하다간 국가 부도위기 사태가 올 수 있기 때문에 긴급하게 대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보사태후 은행들의 외채 차환율이 100%이내로 떨어지는 등 어려움이 있었는데 1·4분기중 외환 대책을 마련해야 하지 않았나.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4~6월을 지나면서 사태가 진정되어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그러나 1·4분기에 외환에 제대로 대처했다고 해서 구조적인 문제로 발생한 IMF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다고는 자신할 수 없다. -97년 10월말 외환시장이 정지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이에 대해서 당시 한은총재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외환변동폭, 즉 밴드가 너무 적었다고 생각한다. 밴드를 확대하는데 10일이상 걸렸는데 빨리 풀지 않아 사태가 심각하게 되었다는데 책임을 느낀다. -97년 3, 4월이나 기아사태가 난 후 IMF와 협약을 맺었다면 훨씬 유리한 조건이 되지 않았는가. ▲적어도 1·4분기중에는 상황이 그렇게까지 악화일로로 치닫지 않았고 8월에 우리가 구제금융을 요청했다라도 IMF가 지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외환위기로 치닫는 과정인 97년 10월 26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나라는 외환보유고가 300억달러에 육박하기때문에 외환위기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여기에는 당시 금융기관 해외 예치금과 선물환투자, 태국정부와 스와프한 금액등이 포함되어 있다. 물론 예치금은 외환위기 과정에서 보유고로 활용할 수 없었다는 점을 시인한다. 그러나 외환위기을 막기위해 예치금을 회수했으면 은행들이 큰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캉드쉬 IMF총재 방한 전에 부총리 등과 예비협의과정에서 지원요청 금액을 논의했는가. ▲11월 15일 협의에서는 금융개혁법안에 대한 논의와 지원요청을 하자는 대강을 잡았다.얼마를 요청할지는 정하지 않았다. 다만 14일 姜부총리가 대통령에게 IMF행을 보고하면서 200억달러라고 지원규모를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받은 것으로 안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여기에 100억달러를 합쳐 300억달러 이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온종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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