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체험. 유서를 쓰고 관 속에 들어가 망자(亡者)가 돼보는 엽기 경험을 해본 이들의 소감은 비장하다. 헛되이 살아온 자신의 삶, 그리고 남은 생의 귀중함에 몸서리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남녀, 장년ㆍ청년 불문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장애인 혹은 노인 체험을 해본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반응도 엇비슷하다. 불우한 이웃의 일이라면 쌀쌀맞기 일쑤였던 사람들조차 웬만큼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어떤 사안 그리고 남을 이해하는 데는 자신이 직접 그 자리에 서보고 느껴보는 것만한 방법이 없다.
평형감각 잃어 갈등·혼란
정신병동에 사이코 드라마라는 게 있다. 이 드라마 속에서 정신 치료자들은 상대에 대한 이해를 치료의 바탕으로 삼는다. 상대의 처지에서 그의 눈을 통해 자신의 문제를 보고 나아가 상대를 이해하고 자신과의 차이를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너’와 ‘나’의 역할을 바꿔보는 이른바 ‘롤 리버설(role reversal)’. 이 정신과 치료법을 통해 보는 인간의 이성은 본질이 불안하다. 생각만큼 단단하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 걸핏하면 흐트러지고 갈등과 몰입의 구조 속에서는 특히 평형감각이 무너져 극단으로 치닫는 경우가 흔하다.
지금 우리 사회가 집단적으로 앓고 있는 증세는 바로 이 극단의 상황, 평형감각 상실의 문제다. 사안을 전체로 보지 않고 자기 위치에서만 보니 정치 따로, 국민 따로 균형은 깨지며 생기느니 갈등이요 혼란이다.
남의 자리에 서보지 않는 것은 대한민국 사회의 위아래가 따로 없다. 들끓는 여론이 그저 분하다며 대통령은 분풀이식 통치의 수위를 갈수록 높일 뿐 국민들이 지도자로부터 듣고 보고 싶은 바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오기의 정도는 반노(反盧) 쪽이라고 절대 모자랄 리 없다. 모든 것을 대통령의 책임으로 돌리며 이 정권의 최소한의 긍정적 측면조차 무조건적으로 부정, 입만 열면 청와대 비난에 침을 튀기고 있다. 강권통치 시절에는 ‘용비어천가’를 불러대던 수구 언론을 필두로 한 기득권 세력들이 높이는 북소리의 건너편, 실패를 인정할 줄 모르는 정권 주변의 아마추어 실세들. 그들 사이의 ‘소통의 다리’는 애당초 없었음이 틀림없다.
당장 하루하루 살 일이 걱정인 서민들을 앞에 두고 봉합되지 않는 갈등만을 낳고 있는 청와대를 보는 국민의 답답한 마음 그리고 사사건건 무수히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맞는 지도자의 상황을 바꿔서 생각해보는 교차적 노력을 조금이라도 가슴깊이 해봤을까.
여하한 권력자라도 끝끝내 흔들어대면 견딜 재간이 없고 막중한 직분을 잊고 부적절한 말로 설화(舌禍)만을 만들어가는 대통령에 언제까지나 인내할 국민도 없다.
나 그리고 남에 대한 잣대가 완벽히 모순된 자기 기만적 파행의 구조는 이제 노사간ㆍ계층간 등 집단과 집단을 넘어 개인간까지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오늘 대한민국 사회의 상황 논리로 번져나가는 현실이다.
소득이 아닌 문화ㆍ사회적 측면의 선진국 도약의 조건은 지금 우리 사회에 팽배해 있는 바로 이 같은 행태를 어떻게 떨쳐버리는가의 문제로 쏠린다. 죽기 살기로 점수 따기 경쟁만을 교육이라고 해온 우리에 비해 어려서부터 ‘타인과 나’ 사이의 합리적 ‘관계 설정’의 룰을 훈련받아온 문화 선진국을 따라잡는 것은 올바른 상황 인식이 그 출발점이다.
타인 이해능력이 곧 합리
얼마 전 경기와 충남 지사가 각각 하루 동안 자리를 바꿔 앉은 일이 언론을 탔다. 지역개발을 둘러싼 이해로 양 도(道)가 건건이 부딪히면서 현안 해결을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일회성 이벤트인 측면이 있음에도 불구, 구습(舊習)을 깨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가 무엇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눈길 가는 사례다.
어지러운 세태를 풍자하는 사자성어가 난무하는 요즘, 또 하나 말의 성찬이 겸연쩍지만 새해를 열며 우리 모두에게 건네고 싶은 경구 하나,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나와 남을 바꿔놓고 생각할 줄 아는 능력이야말로 한 나라의 민도(民度)다. 그리고 이 땅에 사는 개개인들이 갖춰야 할 합리요, 도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