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택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은 “미국의 구제금융 이후에도 시장 불안은 여전할 것” 이라며 “위기상황이 오래갈 것이라는 점이 가장 큰 위험”이라고 강조했다. 현 원장은 지난 2일 서울 회기동 KDI 본부에서 서울경제신문과 인터뷰를 갖고 “구제금융이 없는 것보다 있는 게 낫다는 데 동의하지만 정답인지는 알 수 없다”면서 “구제금융을 실시해도 (시장상황은) 불투명하다는 게 정론”이라며 이같이 말했다. 현 원장은 그러나 금융위기를 계기로 “신자유주의가 망했다고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시장을 존중하는 경제정책 기조는 유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 국제금융시장과 북한 정세가 불안정한 시점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만한 안전판이 없다”며 “국회가 한미 FTA 비준안을 먼저 처리하는 것만으로도 한국의 신인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현 원장은 “식량사정 등 북측 경제상황을 볼 때 남북관계 경색이 내년 3월 이후까지 연장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발 국제금융위기가 전세계에 파장을 일으키며 최대 현안이 됐습니다. 외환시장에서는 하루 단위로 돈을 빌려야 하고 리보(런던 은행간 금리)는 하루에 몇 백bp(bp=0.01%포인트)씩 오르고 있습니다. ▦리보 급등은 신용이 기본이라는 은행끼리도 못 믿는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유동성 경색은 국제적으로 똑같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등에 비해 외환시장의 폭이 작고 깊이가 부족해 변동이 더 큽니다. 하루에 환율이 30~50원 뛰는 것이 다반사니 외환에 관계하는 사람들이 경제 상황에 불안감을 갖게 되는 거죠. -외환시장 변동성이 저렇게 크게 움직이다가 자금조달이 막혀 흑자부도라도 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있는데요. ▦금융 건전성을 유지하면 위험을 극복할 수는 있겠지만 경제위기가 오래갈 것이라는 게 제일 걱정입니다. 미국보다 더 불안한 게 아시아 시장이어서 돈을 빼가다 보니 그동안 많이 요동을 쳤어요. 미국 시장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크고 작은 요동이 상당 기간 지속되고 우리 경제생활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줄 겁니다. 국내 금융기관들이 도산할 가능성은 낮다고 봅니다. 하지만 은행이나 기업은 고비를 넘겨도 돈 가뭄 상태가 지속되기 때문에 금융경색 또는 금융 비용부담 상승은 계속될 겁니다. 단기적으로 오늘 내일 부도 등 뭐가 터져서 문제가 될 가능성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뇌졸중으로 확 쓰러질 가능성은 낮지만 혈압이 높은 상태로 가다 골병이 들 수 있다고 봅니다. -미국의 구제금융안이 실행되면 위기가 진정되겠습니까. ▦(구제금융이) 정답인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대부분의 전문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다’ ‘없으면 재앙이다’ 이런 거죠. 구제금융 실시 이후도 불투명하다는 게 정론인 듯합니다. 미 금융기관들이 쏟아낼 부실이 7,000억달러를 넘으면 다음에 대처할 방법이 뭐가 있느냐는 문제가 있고요. 금융위기의 원인이 됐던 미국 주택가격 버블이 70% 정도 꺼진 것으로 분석되는데 30%마저 내려간다면 위기요인이 그만큼 커진다고 봐야 합니다. -금융위기 상황에서 정부 대응능력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우선 급하니까 한국은행과 기획재정부가 자주 긴밀히 협의하는 것 같아요. 서너 달 전과는 차이를 느낄 수 있어요. 하지만 전반적인 시스템 측면에서 보면 아쉬움이 있습니다. 국제적 공조능력도 그 중 하나인데 중국이 달러를 1조8,000억달러나 쌓아놓고 있으니 중국과 잘 협조하면 좋을 텐데요. 또 미국을 보면 대통령 선거가 한 달밖에 안 남았으니 엄청 싸울 텐데 중요한 거 할 때는 합니다. 반면 우리는 정치권이 너무 명분에 집착해 할 일을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위기상황에서 정부가 꼭 유념해야 할 점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는 미국보다 금융 건전성이 상대적으로 낫습니다. 부동산 가격 안정차원에서 주택담보인정비율(LTV), 총부채상환비율(DTI) 등을 엄격하게 했고요. 따라서 정부가 최근 부동산 거래 활성화를 위해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금융규제를 완화해서는 안 됩니다. 금융규제를 완화한다고 경기가 살아나기도 어렵지만 그걸 건드리면 세계적인 금융불안 시기에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금융위기뿐 아니라 조선ㆍ철강ㆍ자동차 등 주력산업이 위축되며 성장잠재력 측면에서 위기가 심화되고 있다는 지적도 많습니다. ▦성장잠재력이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소위 경제 펀더멘털이 좋으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한국이 가는 길이 바르면 그 효과가 3~5년 뒤에 나와도 지금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신성장동력을 육성해 성장잠재력을 높이려면 정부는 광범위하게 기초 연구개발(R&D)과 교육을 담당하고 그 이후는 시장에서 기업들이 하면 됩니다. -성장잠재력을 높일 방법은 무엇일까요. ▦자동차ㆍ조선ㆍ철강 같은 주력산업을 고부가가치화하는 것이 중요하고요. 특히 우리는 지식서비스 산업을 키워야 합니다. 한국의 제조업 생산성은 선진국과 비슷한데 서비스는 선진국의 65% 수준에 불과합니다. 서비스업이라고 해봐야 고작 식당ㆍ여관입니다. R&D나 세금지원도 서비스 산업에는 없습니다. 인재가 많아서 의료ㆍ교육 산업은 잘 할 수 있는데 시작조차 못하고 있어요. 산업으로 생각하고 키워야 하는데 ‘공공성’이라는 미명 아래 꽁꽁 묶어놓고 있으니 잘 될 수가 없어요. -이번 금융위기를 맞아 ‘신자유주의는 끝났다’는 지적이 나오는 등 경제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많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더욱이 한국은 시장경제조차 절반 정도 갔을 뿐입니다. 시장원칙을 존중하는 경제정책 기조를 무조건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금융시장에서도 진입규제나 경쟁을 제한하는 칸막이 규제는 지속적으로 완화해야 합니다. 물론 이번 위기를 계기로 통화정책과 감독정책의 틀을 다시 짜야 한다는 논의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미 FTA 비준이 미 의회에서 상당 기간 통과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고 보십니까. ▦한미 FTA에 대해 미국과의 협상이나 비준 전략으로 접근하는 것은 시야가 좁은 겁니다. 지금처럼 외환시장이 불안하고 북한 정세가 불안정할 때 한미 FTA만한 안전판도 없습니다. 국회가 한미 FTA를 먼저 비준하는 것 자체로 해외시장에서 한국의 신인도가 높아질 수 있어요. 북한 문제를 대처하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또 외국인직접투자(FDI)가 2년 연속 순개념으로 보면 거의 제로 상태입니다. 지금 외국 기업인에게 한국의 매력을 높일 카드는 한미 FTA 이상이 없다고 봅니다. -정부의 감세정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시장 활성화 차원에서 기본방향은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감세를 경기부양의 도구로 보면 안 됩니다. 경기가 나빠 돈을 푸는 차원이 아니라 경기가 좋을 때도 감세해나간다는 자세를 견지해야 합니다. 아울러 세수기반을 침해하고 시장 활성화에 역행하는 각종 공제 및 비과세ㆍ감면 등은 정리해야 합니다. 정치권이 쉽게 동의하지 않겠지만 보조금도 줄여나가야 합니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 와병설이 나오는데 북핵 검증은 차질을 빚고 있고 남북관계는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돌파구가 없을까요. ▦교류의 원칙은 북측의 소프트웨어 변화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북측은 변화를 싫어하겠지만 우리는 내부적으로 이런 원칙을 지켜가야 합니다. 북측을 변하게 하는 데 개성공단은 좋은 모델이 될 것으로 봅니다. 또 북측의 국제기구 가입 등을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당분간 남북관계 정체는 불가피하지만 북한의 사정을 볼 때 남북관계 경색이 적어도 내년 3월 이후까지 연장되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현정택 원장 약력 ▦1949년 경북 예천 ▦1967년 경복고 ▦1971년 서울대 경제학과, 행정고시(10회) 합격 ▦1980년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경영학석사 ▦1993년 미 조지워싱턴대학교 경제학박사 ▦1995년 재정경제원 대외경제국장 ▦1997년 주(駐)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경제공사 ▦1998년 대통령비서실 기획조정비서관 ▦2001년 초대 여성부 차관 ▦2002년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 ▦2003년 인하대 국제통상학부 교수 ▦2005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원장 ■ 한국 대표 싱크탱크 KDI 내년 과제는
저탄소 녹색성장 전략 중점 연구 지난 1971년 3월 설립된 한국개발연구원(KDI)은 한국을 대표하는 싱크탱크다. 정부의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수립 과정에서 출발한 KDI는 한국경제 발전과 선진화를 위한 초석을 놓는 데 두뇌 역할을 했다. 개발연대를 지나 급속히 닥쳐온 세계화의 파고 속에서 KDI는 선제적인 연구과제의 발굴과 대안 제시에 주력하고 있다. KDI가 내년도 중점 연구과제로 '저탄소 녹색성장을 향한 중장기 국가전략 수립'을 계획하고 있는 것도 이를 잘 보여준다. 현정택 원장은 "전지구적인 기후변화협약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면 한국경제에 위기요인이 될 수 있다"며 "녹색기술에 대한 연구개발(R&D)을 적극 수행하고 신재생에너지 사용을 확대하는 동시에 국제협약에 적극 참여한다면 기후변화는 한국경제에 또 다른 기회요인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KDI는 현 원장 취임(2005년 11월) 이후 중장기 공동연구 과제에서 굵직한 RR&D 성과를 도출해 ▦경제사회 여건 변화에 대응한 사회정책방향(2006년) ▦경제위기 이후 한국의 경제성장:평가 및 시사점(2007년) ▦우리 경제의 선진화를 위한 정부역할의 재정립(2007년) ▦개방화 시대의 한국경제-구조적 변화와 정책과제(2006~2007년) ▦지역개발정책의 방향과 전략(2008년) ▦부동산정책의 종합적 검토와 발전방향 모색(2008년) 등을 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