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2일] <1189> 빈 전투


‘과연 살아날 수 있을까.’ 빈이 공포에 떨었다. 오스만튀르크의 침공으로 완전 포위된 지 2개월여. 국왕까지 도망쳤다. 불과 1만8,500여명의 병사와 싸우던 9만 오스만군은 느긋하게 승리를 기다렸다. 대포로는 깨지 못하는 견고한 성벽 밑으로 땅굴을 파 화약을 터뜨리는 작전으로 시내를 점령해 들어갔다. 함락 직전, 빈에 학수고대하던 낭보가 전해졌다. 유럽 최강의 정예군을 보유한 폴란드를 비롯해 신성로마제국 제후국들의 구원군이 당도한 것이다. 병력은 곧 8만4,450명으로 불어났다. 적군이 증강되는 순간에도 오스만군은 승리를 믿었으나 1683년 9월12일 동틀 무렵 빈 외곽 칼렌베르크에서 폴란드 국왕이 직접 지휘하는 용기병군단 앞에 완전히 무너져버렸다. 전사자 1만여명, 부상자와 포로도 1만명에 달했다. 연합군 피해는 전사 2,000명, 부상 2,500명. 오스만은 대포 300문을 포함한 모든 물자를 버리고 흩어졌다. 빈 전투는 전환점이었다. 유럽은 14세기에 오스만이 발흥한 이래 콘스탄티노플 함락(1453년)과 장마 덕분에 살아 남았던 1차 빈 공방전(1529년)을 겪으며 뼈에 사무친 오스만 공포심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반면 오스만 제국은 이 전투를 계기로 최강대국의 지위를 잃고 유럽 변방의 병자로 전락했다. 커피가 유럽에 전파된 것도 이때다. 노획물 중에서 딱딱한 커피콩을 차지한 한 장교가 이듬해 커피전문점 세 곳을 열어 커피의 세계화가 시작됐다. ‘크루아상’도 승전 이후 제빵업자들이 오스만의 상징인 초승달 모양의 빵을 만들면서 생겨났다.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야만족 오크 무리’가 화약을 터뜨려 성벽을 깨부수는 장면도 오스만의 공성법에서 따왔다. 승자는 모든 것을 다 갖는다. 기호품에서 문화적 왜곡, 편향마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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