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자본시장 새패러다임을 찾아서] 12. 동남아시아

'亞위기' 벗고 금융산업 재편 용틀임97년 3월 3일 태국 주식시장에서는 금융주에 대한 거래가 중단됐다. 97년초 국제금융시장에서는 제2의 멕시코 사태가 아시아에서 일어난다면 태국이 그 진원지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는데 그 충격파가 드디어 태국 증시를 강타한 것이다. 7월부터는 태국 바트화가 바닥을 모르고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시아의 위기」가 시작된 것이다. 외환위기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거쳐 연말에는 한국에도 상륙, 아시아의 떠오르는 용들은 하나 둘씩 추락하고 만다. 현재 동남아 국가의 금융시장은 다소의 차이는 있지만 외형적으로 안정세를 나타내고 있다. 이탈했던 서구 자본이 자본시장으로 돌아오면서 주식시장은 빠르게 회복됐고 느리지만 금융구조조정도 궤도에 들어서고 있다. 동남아시아 이머징마켓 국가들은 외환위기 이전의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외국투자가들에게 구질서의 벽을 깨고 새롭게 태어난 자본시장을 보여주기 위해 내부적으로 큰 진통을 겪고 있다. ◇거대한 고리 동남아시아 각국은 개별적으로 독특한 역사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경제적으로는 하나의 거대한 고리를 형성하고 있다. 말레이반도의 끝에 매달린 싱가포르와 주변 국가와의 관계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싱가포르는 홍콩과 경쟁하며 아시아의 금융중심지로 성장한다는 야심을 키워가고 있지만 서울보다도 작은 도시국가에 불과하다.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로부터 물과 전력을 끌어다쓰고 원유와 식량은 인도네시아등지에서 수입해 쓰고 있다. 전통적으로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는 정치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데 만일 말레이시아가 물 공급을 중단하면 싱가포르는 말라죽을 수 밖에 없다. 싱가포르는 그러나 막강한 금융자본을 바탕으로 말레이시아, 태국, 인도네시아등지에 상당한 투자를 하면서 이 지역 경제를 리드하고 있다. 인구 350만명의 싱가포르는 이들 대국들이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경제적으로 서로 필요한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지난 1월 중순 인도네시아 일부 지역에서 회교 폭동이 일어났을 때 싱가포르앞바다의 빈탄섬에서도 노동자들의 파업이 일어났다. 빈탄은 인도네시아령이지만 싱가포르 자본이 개발한 휴양도시다. 빈탄 노동자들의 스트라이크는 싱가포르 주식시장을 강타했고 빈탄에 투자한 기업들의 주가는 곤두박질쳤다. 지난 97년 외환위기가 전염병처럼 동남아시아를 휩쓴 것도 이들 국가가 경제적으로 치밀하게 얽혀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싱가폴 금융자본은 태국 은행인수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싱가포르개발은행(DBS:DEVELOPMENT BANK OF SINGAPORE)은 태국의 타이다노뱅크를 인수했고 샴시티뱅크 인수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 태국에 투자된 싱가포르 자본을 지키고 태국 금융구조조정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동남아 금융산업의 중심 국가로서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전략이다. 동남아 각국은 유럽연합처럼 단일 경제권으로 통합되기는 어렵겠지만 지역경제의 유기적인 연합이라는 측면에서보면 북남미대륙, 유럽, 중국, 일본에 이어 제5의 경제블럭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충분하다. 일본이 외환위기이전부터 동남아 각국에 진출하고 이지역 구조조정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는 것도 생산기지로서 동남아시아의 유용성과 함께 지역 경제블럭을 충분히 활용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느리지만 갈길은 간다 인도네시아나 태국의 구조조정 과정을 보면 우리나라의 경우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도네시아의 경우 237개의 은행과 9,315개에 달하는 마을은행을 160여개로 통폐합했지만 본격적인 금융구조조정은 올들어서야 시작됐다. 구조조정을 전담하는 IBRA의 총재가 지난번 대통령 선거이후 경질됐는데 신임 총재가 신정부의 지원을 바탕으로 구조조정의 칼을 지금에서야 들이대기 시작했다. 태국역시 마찬가지다. 태국 기업의 부실여신중 40%정도는 정치인이나 정치적 인맥관계에 있는 인사들이 사장으로 있는 기업에서 발생한 것이다. 은행이 채권을 받아내기 위해 소송을 내도 사법부는 가급적 소송 당사자들간의 화해를 유도하기 때문에 법률절차에 따라 채권을 확보하는 과정이 한 없이 늘어진다는 것이 현지 진출한 국내 금융기관 관계자의 설명이다. 이처럼 느리게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지만 동남아 각국은 나름대로 전담기구를 가지고 있고 자본시장을 육성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 싱가포르의 경우 다른 국가들과 달리 외환위기로 인한 타격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오히려 외환위기 이후 지역 금융센터로서 위상을 강화하고 있다. 싱가포르 외환시장협의회에 따르면 싱가포르에 소재한 금융기관들은 외환, 자금거래등 국제금융거래로 지난 98년 한해동안 19억9,000만달러를 벌어들였다. 이는 97년대비 7.1%나 증가한 것이다. 외환위기의 본격적인 쇼크가 98년에 왔다는 것을 감안하면 싱가포르에 진출한 금융기관은 외환위기 특수를 누린 것이다. 99년 상반기중에도 싱가포르 소재 금융기관들은 13억달러의 이익을 기록했다. 싱가포르는 정책적으로 외국 금융기관들이 달러를 가지고 들어와서 국제금융거래에 나서는 것을 적극적으로 우대하고 있다. 싱가포르가 국제금융의 중심지가 되게 함으로써 유발되는 엄청난 수입을 향유하겠다는 것이다. 반면 싱가포르 현지 금융시장에 투자할 경우에는 엄격한 규제를 가하고 있다. 자국 화패인 싱가폴 달러에 대한 투자에 대해서는 특히 규제가 심하다. 자국의 통화는 철저히 안정시키되 싱가포르를 국제 머니게임의 장소로 제공한다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정치적 안정이 자본시장 발전의 핵심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인도네시아가 IMF구제금융을 받은 이후 구조조정이 지지부진한 것도 정치적인 불안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도네시아는 2억 인구와 엄청남 천연자원을 바탕으로하는 경제기반을 가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안정을 찾고 강력한 중앙정부가 등장, 경제개혁을 추진할 경우 동남아의 강국으로 부상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인도네시아 증시는 외국투자자의 매매 비중이 20%대로 떨어졌다. 97년 외환위기 발생직후까지만 해도 자카르타 증권거래소 거래량의 50%를 외국인 투자자들이 담당했었다. IMF이후 외국자본이 인도네시아 시장을 대거 이탈했지만 여전히 인도네시아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엄청난 경제적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태국의 경우는 자급자족이 가능한 경제구조에 대한 믿음이 금융구조조정을 더디게 하고 있다. 실제로 태국 관료들은 외환위기를 자신들의 위기로 여기지 않는 경향이 있다. 현지에 진출한 국내 금융기관의 한 관계자는 『태국인들은 일본등 외국의 금융자본이 태국에 진출해서 현지의 자국 기업에 대출을 했다가 외환위기를 맞아 부실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알아서 빚을 갚으면 된다는 사고를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태국이 그렇다고 외환시스템이나 금융시스템을 방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태국은 외환위기이후 수차례 환율제도를 정비했다. 또 자국 은행의 해외매각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이미 4개 은행이 외국은행에 매각됐으며 현재 2개 은행에 대한 매각협상이 진행중이다. 은행을 외국자본이 지배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거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동남아 각국은 각자의 경제, 사회적 여건하에서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자본시장 발전을 꾀하고 있다. 위기의 진원지라는 오명을 벗고 다시한 번 비상하는 용이 되고자 몸부림치고 있는 것이다. 싱가폴=정명수기자ILIGHT3@SED.CO.KR

관련기사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