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5월23일]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

프로테스탄트 귀족 100여명이 몰려들었다. 국왕 페르디난트 2세의 신교탄압에 대한 반발. 마침 해외로 떠난 왕을 대신해 고위관리 두 사람이 나서 해산을 종용했지만 숫자는 더욱 불어났다. 신교도들은 성안으로 도망친 관리들을 찾아내 창문 밖으로 던져버렸다. 10미터 높이에서 떨어진 곳은 건초더미. 겨우 목숨을 부지한 관리들과 국왕은 보복의 이를 갈았다. 1618년 5월23일, 보헤미아에서 일어난 ‘프라하 창문투척 사건’은 길고 긴 전쟁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체코 땅이지만 당시 프라하는 신성로마제국(독일)의 일부인 보헤미아의 수도. 프라하를 수중에 넣은 신교도들이 자유를 자유를 만끽하던 1619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선출된 페르디난트 2세는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의 군대를 끌어들였다. 1620년 11월 프라하를 되찾은 황제는 가혹한 약탈을 명령했다. 살육은 증오를 증폭시켰다. 신교도 구출을 위해 덴마크와 스웨덴이 참전하고 독일 전역은 국제전쟁터로 변했다. 창문 투척 사건 이후 30년 만에 베스트팔렌조약이 맺어지며 전쟁이 끝났을 때 독일에 남은 것은 잿더미. 국토의 5분의 4가 황폐해지고 1,600만명이던 인구도 약탈과 학살, 기근과 역병 속에 600만명으로 줄었다. 천문학자 케플러도 이때 굶어죽었다. 스페인이 장악했던 유럽의 패권은 프랑스로 넘어갔다. 북구의 강국 덴마크도 약해졌다. 종교 이데올로기도 힘을 잃었다. 카톨릭 형제국들을 ‘배반’하고 신교국을 지원한 프랑스가 득세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독립이 확인되고 근대 자본주의 윤리를 제공한 캘빈파의 종교적 자유가 공인된 것도 이 전쟁의 결과물이다. 군중의 광기와 피의 보복 속에서 국경선을 비롯한 오늘날 유럽의 기본질서가 탄생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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