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16일] <1551> 리엘처형


SetSectionName(); [오늘의 경제소사 11월 16일] 리엘처형 권홍우편집위원 ImageView('','GisaImgNum_1','default','260');

1885년 초겨울의 몬트리올. 400명의 학생들이 프랑스 국기를 손에 들고 밤새도록 시위를 벌였다. 이튿날 4만여명으로 불어난 시위대는 캐나다 총독의 허수아비를 불태웠다. 군중을 분노하게 만든 것은 11월16일 집행된 루이 리엘(Louis Riel) 처형. 리엘의 죽음은 캐나다 연방을 분열시킬 만큼 파장을 불렀다. 프랑스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1844년 태어난 리엘은 소수민족 운동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신학과 법학을 공부했던 리엘의 이름이 처음 알려진 것은 캐나다 연방이 탄생한 지 2년 뒤인 1869년. 연방의 중서부 개척으로 생활 터전이 압박받자 리엘은 원주민과 혼혈인(메티스)을 규합해 저항에 나섰다. 리엘이 주도한 '1차 북서부 반란'의 결과는 매니토바주의 탄생. 대화를 통해 원주민의 권리가 인정되고 캐나다의 정식 주로 편입됐다. 리엘은 3차례 연방 하원의원에 당선됐으나 한차례도 등원하지 못했다. 반역 주동자로 찍힌 탓에 미국 망명길에도 올랐던 그는 1885년 서스캐치원 지역으로 돌아왔다. 이번에도 개발에 밀린 원주민과 메티스의 요청에 의해서다. 리엘의 2차 북서부 반란은 5,000명의 연방군에 의해 가까스로 진압됐다. 체포된 리엘은 '유죄지만 사면 요망'이라는 배심원단의 평결에도 교수대에 매달렸다. 메티스에 동정적인 프랑스계는 리엘의 죽음을 계기로 더욱 단결하고 원주민들도 보다 적극적으로 권리 주장을 펼쳤다. 미국과 달리 캐나다에서 원주민들이 '퍼스트 네이션'으로 불리며 보호받는 배경도 리엘에서 찾을 수 있다. 오늘날 퍼스트 네이션의 힘은 생각 이상이다. 지하자원도 퍼스트 네이션의 동의 없이는 개발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정을 모른 채 자원개발을 위해 연방이나 주정부만 상대했다가 낭패를 보는 한국 기업도 적지 않다. 혼자 웃는 김대리~알고보니[2585+무선인터넷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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