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경제소사/1월5일] 카트린 데 메디치
권홍우 편집위원
정략결혼과 학살, 프랑스 요리와 발레. 한 여인의 삶에 묻어 있는 흔적이다.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은 카트린 데 메디치(Catherine de' Medici).
초반부터 그는 불운했다. 두 명의 교황을 배출한 상인 출신 메디치가 적통의 무남독녀로 1519년 태어났으나 생후 몇 주 만에 부모를 모두 잃었다. 8세 때부터는 피렌체 폭동으로 인근 수녀원에서 숨어살았다.
프랑스 왕자와 결혼한 14세 소녀의 기쁨도 잠시. 바로 사실상의 소박을 맞았다. 동갑인 남편은 30대 중반의 연상녀와 살림을 차렸다. 시부모로부터도 냉대를 받았다. 교황청 재산을 지참금으로 내려던 숙부인 교황 클레멘트 7세가 결혼 1년 만에 사망한 뒤 후임 교황이 지참금 지급을 거부한 탓이다.
지참금과 이탈리아 진출을 위해 교황의 조카딸을 며느리로 삼았던 프랑스 왕실의 구박 속에서 카트린은 결혼 10년 만에 첫아들을 낳았다. 3년 뒤에는 남편이 형의 죽음으로 왕위(앙리 2세)에 올라 왕비 자리도 꿰찼다. 아이도 여덟 명이나 태어났으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앙리 2세가 40세 때 마상시합에서 눈을 찔려 죽고 왕위에 오른 아들들(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도 잇따라 급서해 그는 1589년 1월5일 사망(70세)할 때까지 검은 상복으로 지냈다.
섭정으로 그가 매진했던 것은 왕권강화. 프랑스사 최대 참사의 하나로 꼽히는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학살’도 신교압박을 통한 왕권강화를 꾀한 카트린 모후가 주도했다.
대학살 탓에 ‘악녀’로 기억되지만 카트린은 프랑스에 고급문화를 이식한 주인공으로도 꼽힌다. 건축에 조예가 깊어 불타 없어진 튈트리 궁전, 호텔, 상공회의소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슈농소성(城)을 신증축했다. 오늘날의 프랑스 요리도 피렌체에서 데려온 그의 개인 요리사에 의해 퍼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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