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기자의 눈] 줏대 없는 신용평가

국내 신용평가업체인 한국기업평가는 지난 9월 한 대기업의 신용등급 전망을 ‘긍정적’에서 ‘안정적’으로 한 단계 낮췄다. 업황 변화로 인해 영업실적과 현금흐름 개선 폭이 둔화됐고 대규모 투자자금 집행으로 재무 구조가 불안해졌다는 이유에서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이 대기업은 한달 뒤 무보증 회사채를 발행할 때 한국기업평가를 제외하고 한국신용평가와 나이스신용평가에 평가 업무를 맡겼다. 한국기업평가의 신용전망 하향조치를 괘씸하게 여겨 일감을 주지 않은 것이다.

한국기업평가 관계자는 최근 기자와 만나 “신용평가사가 소신 있게 선제적으로 등급이나 전망을 하향 조치하면 적잖은 보복(?)을 당한다”며 “발행 기업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라고 말했다. 실제로 국내 회사채 시장은 철저하게 발행업체 중심으로 움직인다. 발행 기업이 자사의 입맛에 맞는 신용평가사를 결정하는 구조이다.


회사채를 발행하는 기업이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게 잘못된 것은 없다. 하지만 최근 시장 상황을 보면 발행기업의 입김이 지나치게 작용하면서 부작용이 커지는 듯하다. 신용평가사가 줏대 있는 평가를 내리기에 앞서 발행 기업의 눈치를 봐야 되는 구조여서 신용 위험에 대한 경고의 칼날이 무뎌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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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웅진그룹 사태를 보면 신용평가의 독립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웅진홀딩스가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해당 회사채에 투자한 투자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또 부실화 가능성이 있는 A등급 이하의 회사채 시장 전체에도 악영향을 끼쳤다. A등급 이하의 회사채는 최근 아무리 금리가 높아도 기관들이 외면하는 현상이 커지고 있다.

웅진그룹 사태에서 신용평가사들의 업무 태만을 두둔할 생각은 없다. 발행기업이 제공하는 제한된 정보에만 의존했고 재무위험성을 지나치게 보수적으로 평가했다. 신용평가사들은 웅진그룹 사태가 발생하기 전까지 웅진홀딩스의 신용등급을 A로 평가했다.

하지만 굵직한 기업의 부도가 발생할 때마다 신용평가사들에만 잘못을 돌리기에는 제도적 모순이 크다. 발행사들의 입김이 현재처럼 큰 상황에서 신용평가사들이 줏대 있는 의견을 선제적으로 내기는 쉽지 않다. 신용평가사의 독립성을 강화할 제도적 장치 마련이 절실한 상황이다.

강동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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