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8월19일 새벽, 잠결에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들어 보니 홍수로 일대가 침수되고 있다며 빨리 대피하라는 것이었다. 후닥닥 일어나서 문을 열었더니 수돗가의 세숫대야가 이미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상황이 다급 하다고 판단한 나는 부랴부랴 아내를 채근해서 아이를 데리고 당장 입을 옷 몇 가지와 담요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쏟아지는 빗줄기 속에 스피커폰을 든 누군가가 빨리 대피하라면서 다니고 있었다. 우산은 받쳐들 엄두도 못 내고 겨우 골목길을 빠져 나왔다. 동네 앞길로 넘쳐 흐르는 물이 무릎까지 차오른 것을 보면 비가 와도 보통 온 것이 아니었다.
그 때 갑자기 집사람이 내게 아들을 떠 안기며 말했다.
“성훈이 데리고 먼저 가세요.”
“이런 상황에 빨리 피해야지 어딜 가려고?”
“냄비라도 가져와야 뭐든 끓여 먹지요.” 아내는 그렇게 말하면서 왔던 길로 사라졌다. 물은 점점 몸 위로 더 차오르는데 오도가도 못하고 골목 입구만 바라보면서 집사람을 기다리던 잠깐 동안의 그 시간이 얼마나 길고 초조하던지 아직도 그 때를 생각하면 일각여삼추(一刻如三秋)라는 말이 실감난다. 잠시 후 아내는 냄비 안에 수저를 챙겨 넣은 듯 떨그럭 거리며 뛰어왔다.
물은 허리까지 차 올랐다. 이쪽 저쪽에서는 가족을 찾는 다급한 소리가 간간이 들려 왔고 살려 달라는 비명 소리도 들렸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물이 차올라 어디가 길인지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그나마 높이 솟은 전봇대를 표지 삼아 겨우 길을 더듬어 갔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를 무렵 합정동 언덕진 도로 위로 올라왔다. 비로소 `이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가족을 회사로 대피시켰다. 당시 회사는 임대료가 비싼 종로를 떠나 사장 집 가까운 합정동에 있는 건물 2층을 얻어 사무실 겸 창고로 사용하고 있었다. 나 역시 회사 가까이 망원동으로 이사를 온 터였다.
창고 안의 평상 위에 아이와 짐을 내려놓고 겨우 한숨을 돌리고 나자 날이 밝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도 빗줄기는 여전했다. 사무실에서 내려다본 망원동은 지붕만 보일 뿐 물바다였다. 그런 와중에 지방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아내는 “가족보다 회사 일이 더 중요하냐”며 울먹였다. 하지만 나 아니면 할 사람이 없으니 미룰 수 없었다.
일을 마치고 저녁이 되어 회사로 돌아왔다. 저녁밥은 라면으로 때우고 세 식구가 평상 위에 웅크린 채 밤을 보냈다. 그나마 담요라도 가져온 것이 다행이었다. 다음날도 여전히 평소처럼 서점에 수금을 다니고 책을 배본하면서 회사일을 보았다. 회사 창고에서 사흘을 보내고 나서야 겨우 침수지역의 물이 빠졌다. 집으로 가는 길은 온갖 잡동사니가 뻘과 함께 엉켜서 길인지 쓰레기장인지 모를 정도였다. 집에 도착했을 때 그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참담한 모습이었다.
우리 내외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온갖 쓰레기가 마당 가득 널린 건 그렇다 치고 방이며 부엌이 온통 오물 투성이였다. 물은 천장까지 두어 뼘 남겨 두고 차 올랐었다. 벽이며 장롱 안이며 부엌 찬장 할 것 없이 재래식 변소에서 넘쳐 난 오물과 온갖 쓰레기로 범벅이 되고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릇 몇 개와 옷가지 몇 벌을 추려놓고 이불과 베개 등 살림살이 대부분은 버릴 수밖에 없었다. 전기도 끊기고 수돗물도 나오지 않아서 첫날은 대충 쓰레기만 걷어내고 밤을 보냈다.
다음날부터 수돗물이 찔끔찔끔 나오긴 했지만 여러 집이 청소와 빨래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젖은 벽이며 방바닥을 말리기 위해 방 안에다 연탄 불을 피우기도 했지만 1년 후 그 집을 떠나 이사할 때까지도 습기는 다 가시지 않았다.
그 때 이후 비가 많이 내리면 망원동 생각이 나고 수재민을 볼 때마다 남의 일이 같지 않아서 적으나마 힘을 보태고 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이 때 강우량은 3일 동안 452.4㎜로 1907년 서울측후소가 생긴 이래 최고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한동수기자 bestg@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