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가 쓰는 법이야기] 판사 아가씨 역지사지 입장으로 사건 조정… '젊은女판사=불안' 선입견 바꿔 현낙희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0부 판사 저는 올해로 법원생활 3년차인 여자판사입니다. 지난 3년간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이렇게 젊은 아가씨가 판사라니"였습니다. 여성 법조인의 증가가 최근의 현상이 아님에도 아직도 '발랄한 여판사'는 신기해보이나 봅니다. 이런 반응을 볼 때마다 저에게 재판을 받는 당사자는 어떨까 싶습니다. 법대(法臺) 위의 판사가 머릿속에 그려왔던 이미지(근엄한 중년 남성)와 다르다는 이유로 재판의 공정성에 대해 행여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까 조바심도 납니다. 사실 저도 나이가 들고 경험이 쌓일수록 타인에 대한 이해심도 커진다고 생각하니까요. 그렇다고 제가 나이가 많아 보이도록 이마에 주름을 그리거나 머리모양을 아주머니처럼 일명 '철모 파마' 스타일로 바꿀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 상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고민해본 결과 당사자의 말을 잘 듣고 그들의 입장이 돼 그 심정을 느끼려고 노력한 다음 판단을 내려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처음 하게 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같은 학교 운동선수로 단짝이었던 A, B는 시합이 끝난 날 함께 술을 마시게 되었습니다. A가 만취하자 B는 A를 업고 여관으로 가던 중 무거워서 잠시 길가에 주저앉았는데 그 바람에 A가 뒤로 넘어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습니다. A가 잠시 후 코를 골자 B는 다시 A를 업고 여관으로 가서 침대에 눕힌 후 자신도 옆에서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A는 싸늘한 시신이 돼 있었습니다. 재판 기록에 따르면 A는 머리를 부딪친 충격으로 사망하게 된 것으로 보였습니다. A의 어머니는 B와 그의 부모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고, B를 고소해 B는 과실치사죄로 기소됐습니다. 고민 끝에 조정기일을 잡았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당사자들은 딸 같은 제가 혼자 앉아있는 것을 보고 조금 당황하는 듯했고 '저 아가씨가 과연 내 심정을 알까' 하는 근심어린 표정도 엿보였습니다. 남편과 사별해 아들 하나만을 바라보고 어렵게 살아온 A의 어머니, 만취한 친구를 도와주려다가 갑자기 가해자가 돼 가정형편도 어려워지고 대학진학도 어려워진 B와 그의 부모, 모두 딱하다는 생각을 하며 제가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 자식이 사람을 죽인 자로 몰린 부모의 슬픔을 상상조차 할 수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최대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해보려고 제 남동생을 떠올리며 한 번은 '내 남동생이 A다', 또 한 번은 '내 남동생이 B다'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저렸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상처를 가슴 깊이 묻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겨 조심스레 제 생각을 설명하며 화해를 권유했습니다. 서서히 입장 차이가 좁혀지며 결국 화해가 성립됐습니다. 조정이 끝난 후 감사하다며 고개를 숙이는 당사자들을 보니 처음보다는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진 것 같았습니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두 가족을 보면서 원만히 해결됐다는 안도감 한편에 '가슴의 상처는 여전히 어쩔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돼 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것은 남녀노소를 떠나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각자 걸어온 길이 달라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기는 어렵더라도 진심으로 그 마음을 헤아려보려는 작은 노력들이 쌓이다 보면 저도 어느덧 보다 성숙한 인간이자 성숙한 법관의 모습으로 변해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젊은 아가씨'이지만 마음만은 '따뜻하고 지혜로운 할머니'가 돼야겠다고 다짐하며 다시 한번 한장 한장 기록을 넘깁니다. 입력시간 : 2007/11/19 17: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