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9월17일] <1192> 압록강 해전


1894년 9월17일, 압록강 입구 서해. 청의 북양함대와 일본 연합함대가 맞붙었다. 낮12시50분부터 5시간 동안 이어진 함대 결전에서 일본은 완승을 거뒀다. 청은 군함 14척 중 5척이 격침ㆍ좌초되고 3척이 파손된 반면 일본은 군함 12척 중 3척이 파손되는 데 그쳤다. 인명피해도 청이 전사 850명, 부상 500명으로 일본의 전사 90명, 부상 200명에 비해 훨씬 컸다. 서구 열강은 해전 결과에 경악했다. 외형적인 전력에서 청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청의 해군력은 군함 64척, 어뢰정 24척으로 총 8만4,000여톤. 일본(군함 28척, 어뢰정 24척, 5만9,069톤)을 훨씬 앞섰다. 청의 해군이 4개 함대로 갈라졌지만 북양함대는 가장 강력했다. 1891년 북양함대가 독일에서 사들인 7,335톤급 자매함 진원과 정원을 이끌고 도쿄를 방문했을 때 일본이 공포에 떤 적도 있다. 막강한 북양함대가 왜 완패했을까. 거대한 덩치로 들이받아 적함을 침몰시킨다는 작전이 일본의 벌떼 전법에 막혔다는 전술적인 패착도 있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다. 총체적 부패. 해군 예산의 절반인 3,000만량이 서태후 별장(이화원) 건립과 환갑잔치에 전용되고 포탄 관리부서는 화약을 빼돌렸다. 일본을 떨게 했던 전함 진원과 정원은 단 3발의 주포 포탄을 갖고 싸웠다. 다른 함정에서도 포탄에 들어갈 화약이 규정보다 적어 사정거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압록강 해전의 결과는 청일전쟁의 승패를 갈랐다. 외국 군대가 조선의 땅과 바다에서 혈투를 벌이는 동안 우리의 조상들은 무엇을 했을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청과 러시아ㆍ일본 사이를 오가다 망국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압록강 해전 114주년, 한반도 정세가 심상치 않다. 역사는 정녕 반복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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