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국주의와 제국주의의 부활을 노리는 일본 우익의 망령은 어찌해 그칠 줄을 모르는가.
지난 3월26일은 안중근(安重根) 의사가 순국한 지 95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 의사의 하얼빈의거는 독립운동사상 최대의 쾌거였다. 최근 일본의 우익교과서 문제와 독도 문제로 한일간의 불신의 골이 갈수록 깊어가는 시점에서 안 의사의 거룩한 순국정신을 되돌아보게 되고 아울러 시대를 훨씬 앞서 일본의 제국주의ㆍ군국주의가 동양평화의 가장 큰 위협이라는 안중근 의사의 경고를 새삼 되새기게 된다.
日 제국주의 망령 부활 움직임
1909년 10월26일 아침 안 의사는 일제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함으로써 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에 대한 남아의 용장(勇壯)한 기개를 한껏 떨쳤다. 의거 직후 안 의사는 대한독립 만세를 세번 외치고 의연하게 러시아 헌병에 붙잡혔다. 그리고 만주 동청(東淸) 철도국 사무실로 끌려가 “나는 대한의병 참모중장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적장을 총살, 응징했다”고 당당히 진술했다.
안 의사의 의거는 단순한 독립운동이 아니었다. 그의 거사 목적은 보다 크고 넓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의 구현에 있었다. 그는 뒷날 재판정에서도 이렇게 당당히 진술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있으면 동양의 평화를 어지럽게 하고 한일간이 멀어지게 되기 때문에 한국의 의병 중장 자격으로 죄인을 처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한일 양국이 더 친밀해지고 또 평화롭게 다스려지면 나아가서 오대주에도 모범이 돼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결코 나는 오해하고 죽인 것이 아니다. 나의 목적을 달성할 기회를 얻기 위해 한 것이다.”
이토가 한일간의 진정한 우의뿐 아니라 나아가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간웅(奸雄)이기 때문에 처단, 제거했다는 것이다. 안 의사가 이미 95년 전에 이렇게 분명한 교훈을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아직도 반성하지 않고 있다.
안 의사의 의거 이후 조선을 강점하고 중국을 침략하고 마침내 전쟁을 일으켰다가 패망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60년이 흘렀는데 또다시 군국ㆍ제국주의의 망령을 되살리려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를 날조하고 왜곡한 우익교과서 채택 흉계와 독도 영유권 억지주장이 이를 확실히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의거 직후 러시아군으로부터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안중근 의사는 뤼순(旅順) 감옥에서 고초를 당하다가 이듬해 1910년 3월26일에 순국했으니 그 해에 아까운 나이 31세였다. 안 의사는 순국하기 전에 두 동생에게 이렇게 유언했다.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옆에 묻었다가 국권이 회복되면 고향 땅에 도로 가져다가 묻어라.”
그런데 매우 통탄스럽고 안타까운 사실은 아직까지 그의 무덤과 유해를 찾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생각할수록 우리는 참으로 못난 후손이다. 아직도 극일은커녕 일본의 거듭되는 망언망동에 제대로 대처하지도 못하고 있으니 안중근 의사를 비롯한 선열들께 면목이 없다.
선열들은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이처럼 피눈물을 흘리고 목숨을 바쳐 싸웠건만 그동안 우리 못난 후손들은 무엇을 했던가. 안중근 의사의 시신은커녕 무덤도 찾지 못하고 있으며 올해로 광복 60주년을 맞건만 그저 남북으로 갈라져 헛된 싸움질만 되풀이하며 통일도 못 이루고 있지 않은가.
선열들의 순국 정신 되새겨야
아니, 통일은커녕 이제는 지역간의 갈등에 더해 우파니 좌파니,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갈등, 신ㆍ구 세대간의 갈등, 빈부격차에 따른 상대적 박탈감 등등 남남갈등까지 갈수록 심화되고 있지 않은가. 뿐이랴. 그동안 제대로 된 역사교육과 윤리교육의 부재 탓에 비롯된 젊은 세대의 패륜적 정신황폐증을 생각하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그래서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하는 것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못난 나라, 역사의 뼈저린 교훈을 망각하는 정신이 썩은 겨레에 무슨 밝은 미래가 있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