林鍾乾 편집국차장개혁이 지지부진하다. 경제가 회생기미를 보이는 듯 하자 정부·민간을 막론하고 개혁의지가 느슨해지고 있다. 고질적인 집단이기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면서 개혁의 길목을 가로막고 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3대개혁의 완수를 위해 노심초사하고 있으나 정부·여당조차 대통령의 의지를 공유하고 있는 분위기가 아니다.
개혁이 지지부진한 것은 무엇보다 개혁에 대한 철학과 원칙과 방법의 빈곤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시장경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인식의 정도가 치열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점에서 개혁의 모범사례로 세계적으로 널리 회자되는 뉴질랜드 개혁의 바탕을 다시한번 되돌아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뉴질랜드는 하이예크주의자에 의해 개혁되고, 실용주의자에 의해 운영되며, 사회주의자인 국민들이 사는 나라라는 평가가 있다.
여기서 하이예크식 개혁이라함은 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일컫는다. 하이예크(FRIEDRICH AUGUST VON HAYEK·1899~1992)는 100년전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경제학자로 이코노미스트지(誌)에 의해 「금세기 경제적 자유주의의 위대한 대변자」로 칭송된 자유주의의 사상가이다.
1944년에 출간된 대표적 저작인 「예종(隸從)에의 길(THE ROAD TO SERFDOM)」에서 그는 정부의 역할은 개인의 자유를 보호하는 것으로 그쳐야 한다고 갈파했다.
정부가 백성에게 유토피아를 약속하며 인위적인 질서를 부여하려 하지만 이는 백성을 노예로 만드는 폭정을 결과할 뿐이며 그 생생한 예가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라고 주장했다.
동구의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도 마찬가지의 길을 걷게 될 것이라는 그의 예언이 적중함으로써 그의 예지는 오늘에와서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그는「자생적인 질서(SPONTANEOUS ORDER)」야 말로 인류발전의 원동력으로 보았는데 이는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과 사상적으로 맥을 같이하는 명제이다.
그는 자생적 질서의 표본으로 시장을 들었다. 시장에선 경제이론이나 정부의 간섭 없이도 훌륭하게 교환행위가 이뤄지는데 이는 교환당사자 간에 도덕과 법에 따른 행동규칙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파했다.
이같은 하이예크의 사상을 배경에 깔고 뉴질랜드의 노동당 정부는 84년부터 개혁에 나섰다. 정부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있었기 때문에 정부는 혁명적인 방법으로 개혁에 솔선수범했다. 국공영 기업을 대담하게 민영화했고, 중앙정부의 공무원수를 절반으로 감축했으며, 정부의 회계정책에 기업의 회계방식을 도입했고, 정부의 고위관리를 연봉제로 민간에서 기용했다.
개혁의 주도인물이었던 로저 더글러스 재무장관은 개혁은 정치적인 지지가 선행돼야 성공할 수 있다는 재래적인 견해를 거부했다. 그는 정치적 지지확보는 개혁의 질(質)을 타협하는 것으로 개혁의 비용만 추가하고 반대의 씨앗을 뿌리는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국민적 합의는 만족할 만한 개혁의 성과가 나타날 때 점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며 이에따라 개혁은 「빅 뱅」식으로, 또 개혁이 완수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수행돼야 한다는 중요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요컨대 개혁이 실제적인 성장과 번영을 가져온다는 믿음을 줘야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다는 실용주의적인 실천전략에 입각해 개혁을 밀어붙였다.
개혁의 혜택이 전분야에 확산됨에 따라 뉴질랜드의 개혁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되었고 90년에 집권한 국민당 정부에도 개혁의 과제는 고스란히 승계되는 등 정권을 초월해 추진되고 있다.
지금 우리의 개혁은 어느 지점에 서 있는가. 정부는 개혁을 한다면서 정치적인 타협을 하기에 바쁘고 이익집단의 저항에 발목이 잡혀 있다. 개혁을 하려면 정부의 힘이 강해져야 한다는 주장도 공공연 하다. 더욱이 설익은 정책들이 남발돼 하루가 멀게 수정되는 등 정부 스스로 정책의 신뢰를 잃고 있다.
민간도 집단과 지역으로 갈려 이기주의에 함몰돼 있다. 경영이 안돼서 문을 닫아야 하는 공장을 계속 돌리라고 데모를 하는 사회이다.
기업은 정부의 규제만 탓할 뿐, 경영의 효율화 투명화 노력에는 게을리하면서 변칙 때로는 불법까지 동원해 재산을 불리고 세습한다. 기업인 단체가 「실패한 경영자는 퇴출돼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말을 해놓고도 하룻만에 그것은 그 단체의 공식입장이 아니다고 딴소리를 하는 사회이다.
개혁의 주체인 정부에 명확한 개혁철학, 단호하고 실용적인 실행전략 없이는 개혁을 완성할 수 없다. 현 정부는 이제라도 개혁의 사상적 바탕과 추진수단을 재정비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개혁은 이미 절반은 물건너 간 것이나 다름없다. IMJK@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