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LG그룹:4/헝가리 합작 파농 화학사(한국기업의 21세기 비전)

◎노사간 진솔대화·인사고과제 도입·전략상품 새 개발/「적자의 늪」 탈출 동구공략 “선봉”/한때 경영 불신에 철수고려… 근로자들 자발적 혁신노력 작년부터 “흑자”로「비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다.」 LG화학의 헝가리 합작법인 LG파농사는 이 속담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세계 어느 곳에서나 진리로 통함을 실증하고 있다. 1922년 설립돼 헝가리 최대의 국영 플라스틱업체인 파농플라스트사가 LG화학과 50대 50 지분비율로 합작회사를 설립한 것은 지난 92년7월. LG파농은 93년 1월부터 PVC바닥 장식재, 문구류 PVC시트 등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LG파농은 국내기업 가운데 동구권에 진출한 순서로 따져 거의 선두권 주자에 해당된다. 하지만 파농은 가동 첫해인 93년 2백10만달러, 94년 1백만달러의 적자를 연거푸 기록, 많은 국내외 관계자들에게 실망을 안겼다. 생면부지의 땅에서 사업을 시작한 업체로선 어차피 초기 몇해의 적자가 불가피하지 않느냐는 시각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내부사정을 살펴보면 당시 파농사는 중대한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먼저 LG파농의 납입기준 자본 규모가 1천8백50만달러이므로 첫해부터 납입자본의 10%를 웃도는 적자를 기록한 사실은 간단히 넘길 사안이 아니다. 더욱 근본적인 문제는 한국서 파견된 LG측 경영진과 노조를 비롯한 헝가리직원 간에 불신과 상호갈등이 심각한 수준까지 악화돼 있었다는 점. 이바람에 파농의 경영 악화가 가속되고 회생 기미마저 보이지 않아 LG화학은 한때 중도 철수를 검토하는 상황에 이르기도 했다. 파농사는 부다페스트시 중심에서 15㎞쯤 떨어진 외곽지역에 1만9천평 부지와 1만1천평 규모의 공장건물을 가진 겉으로 보기엔 버젓한 회사다. 다만 인수당시 기존 설비가 워낙 낡은데다 가동률과 생산성이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또 종업원의 3분의 1을 감축했음에도 설비에 비해 인력과잉이 완연했고 종전까지 이 회사 생산제품의 50%를 소화해온 구소련과 동구시장이 붕괴되면서 매출이 급감했다. 합작과 동시에 한국측 경영진들은 ▲대폭적 감량경영을 통한 코스트 절감 ▲생산성 제고를 위한 설비의 합리화 ▲서유럽시장을 겨냥한 신제품 개발 등을 골자로 경영혁신안을 제시했다. 자본주의 국가의 민간기업 입장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자구책의 모색인 셈이다. 하지만 헝가리측 경영진들은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국가가 이익을 보장해 주므로 생산코스트를 늘리는 것이 회사에 오히려 더 유리하다는 종전 발상을 고집, LG측의 혁신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근로자들도 왜 한국서 온 사람들이 설비 합리화, 신제품 개발, 생산성 향상 등 전혀 듣지못한 일들을 줄기차게 요구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파농사 작업현장의 건물구조나 설비 배치방식 등을 살펴보면 지금까지 경영·고용 철학의 기본 발상이 어떠했는지 짐작할 만하다. 예를 들어 바닥장식재를 생산하는 기존 설비의 경우 PVC 원자재 시트를 압축하는 여러 개의 롤러가 모두 같은 높이에 수평 배치돼 있다. 따라서 이 설비의 크기는 폭이 20m를 상회하며 줄잡아 5∼6명이 달라붙어야 정상조작이 가능하다. 반면 최근 LG화학에서 들여온 한국산 설비는 롤러가 공간을 따라 사선 형태로 붙어 설비의 전체 폭이 4∼5m에 그치며 2∼3명이면 충분히 조작할 수 있다. 이 공장의 천장 높이는 무려 7∼8m에 이르는 반면 가장 큰 설비의 높이가 3m를 넘지 않으므로 작업장내 공간활용의 효율성도 어처구니없이 낮다. LG화학은 2년 가까운 적자 끝에 94년 10월 헝가리의 파농플라스트측 임원 3명을 서울로 불러 철수 여부를 판가름짓는 임시 주주총회를 열었다. 그런데 이 회의에 앞서 보름가량 현지에 파견돼 LG파농의 실태를 조사한 한국측 보고서는 최대 난제인 노경(LG그룹은 노사를 이렇게 표현함) 갈등을 해결할 경우 아직 절망적인 상태는 아니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주총은 일단 모든 것을 원점에 되돌려 새출발하기로 결론을 맺고 한국측 경영진 3명을 전격교체했다. 또 경영 회복의 조짐이 비칠 경우 증자 등 추가 지원을 해 주기로 약속했다. 새 경영팀은 먼저 노조에 대해 회사가 직면한 위기상황을 설명하고 이를 돌파할 비전을 제시하면서 협조를 구했다. 중간 간부들에게 인사고과권을 부여하고 사업계획 및 목표 수립때도 그들 의견을 과감히 수용했다. 이와함께 회사가 생산중인 제품의 경쟁력을 품목별로 분석, 서유럽시장 개척이 가능한 문구·테이프용 연질시트류를 전략상품으로 삼아 전력투구하기로 했다. 종전까지 파농의 주력제품은 PVC바닥장식재로 총 매출의 38%를 차지했었다. 하지만 생산제품의 규격이 폭 1.5m에 그쳐 과거 코메콘국가에선 꽤 인기가 있었지만 3∼4m짜리 제품만 쓰는 서유럽에선 폐품이나 다름없다. 문구용 시트 등을 주력 품목으로 삼아 시장 개척에 나서자 중부유럽인 헝가리가 의외로 서유럽 공략에 적절한 입지임이 드러났다. 독일 슬로바키아 네덜란드 등 서유럽 시장은 소량다품종 위주의 주문생산이 대부분이고 주문규격도 매우 다양한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국이나 일본 등 먼 거리에서 선박편을 통해 소수 품목을 대량 수송할 때보다 단위당 30∼40% 이상 비싼 값을 받는다. 더욱이 헝가리는 EU(유럽연합)의 준회원국이어서 관세혜택이 주어진다. 현재 서유럽 수출용인 PVC 연질시트는 총 매출의 60%를 차지할만큼 힘찬 신장세다. 새 경영팀은 근로자들에게 매우 강한 형태의 경쟁 체제를 도입했다. 인사고과는 먼저 노조와 총액기준 20%내외 임금인상에 합의한 뒤 헝가리인 중간간부의 고과결과에 따라 개인별로 5∼40%까지 인상률을 차등 적용했다. 임금 조정을 1년에 2회씩 실시함으로써 고과에 따른 격차가 현저히 두드러졌다. 또 매월 6∼8명 단위의 팀별로 실적을 비교 평가, 총 26개 작업팀중 상위 3팀에겐 상장 수여와 회식비 수준의 격려금을 지급했다. 월별 성적을 연간으로 따져 최하위 3개팀에 대해선 팀장을 직위해제하는 벌칙규정도 도입했다. 근로조건의 개편내용은 노조측에 사전 통보돼 합의를 거쳤음은 물론이다. 노조위원장 산토씨는 『노사가 회사 경영에 반반씩 의사 결정권을 갖고 있는데 초기 2년간 한국측 경영자들은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해 근로자들의 자발적인 개선노력을 외면했다』고 지적했다. 이 결과 파농사의 매출은 95년들어 전년비 60% 이상 신장됐고 95년 9월엔 월간 손익이 마침내 흑자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올해는 당초 매출액대비 6.8%의 세전이익률 달성을 목표로 세웠으나 급격한 환율변동 등 외부여건 변화로 3%대의 세전이익을 달성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LG파농의 부사장 리마 미크로스씨(헝가리는 우리나라처럼 성을 먼저 씀)는 『지금까지 파농에서 20여년간 일해왔지만 근로자를 포함한 모든 직원들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수출담당이사 거러미 라스로씨는 『품질개선을 위해 생산파트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으며 아직 충분한 가격 경쟁력이 있어 환율변동에도 수출 차질은 그다지 없는 편』이라고 강조했다.<부다페스트=유석기> ◎인터뷰/정충시 LG파농 법인장/“노에 과감한 권항이양 경영호전/올 PVC필름 50만불 한국 수출도” LG파농의 정충시법인장(이사)은 『상호신뢰를 바탕으로 한 노경화합이 가장 중요하며 과감한 권한 이양으로 자발적인 참여와 자질향상을 촉구한 것이 경영호전의 비결』이라고 말했다. 정법인장은 『서구시장 개척이라는 새전략이 맞아떨어져 현지 직원들이 스스로 성취를 확인케 됨으로써 이른 시일 내 흑자전환이 가능해졌다』고 덧붙였다. ­현지 근로자들의 작업규율은 어떤 수준인가. ▲개개인으로 보면 근로열의는 대단하다. 몸집이 좋은 헝가리 직원들은 50∼60㎏짜리 원자재를 컨베이어벨트 등 기계에 의존치 않고 혼자서 거뜬히 들어 옮긴다. 이들에게 작업능률 제고를 위해 컨베이어 등 몇가지 설비를 보완해주었더니 매우 놀라워했다. ­노경간 신뢰회복을 강조했는데 문화적 차이로 고전하지 않았나. ▲한국 작업장에선 흔히 볼 수 있는 슬로건이 적힌 플래카드에 대해 이들은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공산주의식 구호에 질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올 연초 개인별 팀별 작업진도 그래프를 게시판에 붙이자고 제안했더니 무려 두달간 내부토론을 한 끝에 겨우 채택됐다. 팀별 포상제 실시 이후엔 자기들도 열이 났는지 팀별로 구호를 적어 붙이기 시작했다. 임금인상률 차등적용도 고과 결과에 대해 자체 내부의 컨센서스를 거쳐 확정한 뒤 경영진에 통보한다. 팀장도 팀구성원에 대해 고과권을 갖고 있으며 반장은 5∼6개팀을 관할하는데 예상외로 잡음이 없는 편이다. ­서유럽시장 개척에는 품질과 생산성의 동시 향상이 필요했을 텐데. ▲초기에는 근로자들이 『왜 골치아프고 까다로운 EU쪽으로 수출하는지 모르겠다』며 짜증을 냈다. 이들에게 왜 서구시장을 개척해야 하는지, 왜 품질을 높이고 코스트를 낮춰야 하는지를 일일이 설명해야 했다. 그후 파농근로자들은 스스로 품질 향상에 매진한 결과 지난해 LG그룹이 경영혁신 활동의 하나로 실시한 「SKILL」 활동사례 발표대회에서 해외법인분야 우수상을 타기도 했다. ­주요 수출시장은 어디인가. ▲스페인 포르투갈을 제외한 중서부 유럽과 스웨덴 등 북유럽, 러시아 에스토니아 등 CIS국가를 두루 포함한다. 특히 올들어 50만달러어치의 PVC필름을 한국 본사에 수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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