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12월 2일] <1565> 그란마호


1956년 12월2일 새벽, 쿠바 남동부 오리엔테주 바닷가. 길이 18m, 폭 4.8m에 디젤엔진을 장착한 요트 한 척에서 반군 82명이 내렸다. 쿠바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순간이다. 피델 카스트로(당시 40세)가 미화 1만5,000달러로 구입한 그란마호가 멕시코를 출항해 뭍에 닿기 까지 일주일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건조 당시(1943년)의 적정 승선인원 12명보다 7배 가까이 많았던 인원에 무기와 탄약까지 싣고 대서양을 헤쳐온 그란마호는 상륙도 순탄치 않았다. 의사로 의무장교였던 체 게바라가 '상륙보다는 좌초에 가까웠다'고 말했을 정도다. 항해와 좌초에 지친 반군 앞에는 전투기까지 동원한 정부군이 기다리고 있었다. 게릴라전을 위해 산으로 피신했을 때 살아 남은 반군은 불과 14명이었으나 기적이 일어났다. 무기와 식량ㆍ자금도 없고 수염을 깎을 시간도 없어 '텁석부리 부대' 로 불리던 반군을 위해 농민들이 병사로 자원하고 식량과 돈을 건넸다. 결국 반군은 정부군을 물리치고 2년 뒤 수도 아바나에 입성,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다. 소수 인원으로 시작한 혁명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은 부패와 빈부격차. 미국의 여론도 처음에는 혁명을 반겼을 만큼 쿠바는 병들어 있었다. 혁명의 상징격인 그란마호는 쿠바인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상륙지점이었던 오리엔테주가 그란마주로 바뀌고 기념관과 신문ㆍ국립공원ㆍ대학에 그란마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란마호 상륙 53년을 지나는 동안 쿠바는 혁명과 토지ㆍ화폐개혁, 미국과의 관계단절, 사회주의권 편입과 공산권 몰락이라는 부침을 겪었다. 막대한 경제ㆍ군사 원조를 제공하던 소련 붕괴 이후에도 여전히 버티고 있는 쿠바에서는 이런 선전 간판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란마호의 항해는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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