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시각] 문화는 영화만이 아니다


뚜껑 아래서 김치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다. 밥상을 둘러앉은 사람들의 숟가락이 냄비를 들락거린다. 남의 입을 댄 숟가락이 들어간 국이라고 같이 떠먹기를 꺼리는 사람도 있다. 혹자는 한 그릇에 나눠 먹는 것이 우리 고유의 풍습이라고 이야기한다. 전통 한식 전문가들은 한사코 반대한다. 우리의 식사예절은 개별적인 그릇을 사용하는 것이란다.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고 살림살이가 어려워지면서 그런 마구잡이 식사법이 생겼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굳어졌다는 주장이다.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최근 문화융성이라는 말이 화두다. 문화융성이라고 할 때는 크게 두 가지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보다 많은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것과 함께 '돈이 되는' 문화산업을 키우는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과정에서 문화의 범위가 극도로 좁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라는 이름은 점차 미술이나 영화·책·K팝·한식 등으로 한정되고 있다. 바로 정부부처인 문화체육관광부의 '문화' 파트에서 담당하는 업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화'라는 단어를 처음 접하는 것은 학교 교과서를 통해다. 보통 문화와 문명을 비교하면서 문화에 대한 이미지를 키운다. 문화는 정신적인 측면, 문명은 물질적인 면이라는 설명도 있고 문화가 문명보다 더 포괄적이라고도 한다. 원래 문화라는 것은 우리 생활을 지배하는 모든 것이다. 정확히는 긍정적인 모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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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회가 전문화되면서 문화라는 용어도 나름의 전문분야를 갖게 됐다. 가리키는 범위는 훨씬 좁아졌다. 앞서 말한 우리의 전통적인 식사예절은 고유의 문화다. 지금은 이것이 한식의 부속 이벤트로 축소됐다. 일상생활로써가 아닌 하나의 문화상품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일상과는 다른 뭔가 별난 것을 하는 것으로 의미도 바뀌고 있다.

문화융성이라는 것은 우리가 좀 더 품위 있게 살자는 것이다. 영화나 연극 한편 더 보고 미술에 대한 조예를 깊게 하는 것도 나름 중요하다. 이는 아주 일부분이다.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공동체를 발전시키고 너 나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문화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계가 추구해야 하는 명분이기도 하다.

올 초부터 도로명주소가 전면 시행되고 있다. 길 찾기가 훨씬 쉬워졌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우리가 살아온 마을이라는 공동체를 잃어버리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주소 체계가 문화와 무슨 상관이냐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우리가 추구할 공동체 문화를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당연히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선 방안을 찾을 일이다. 우리 문화를 상품·이벤트라는 좁은 테두리에 가둬둬서는 안 된다. /최수문 문화레저부 차장 chsm@sed.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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