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아산 탄생 100년] "전인미답의 성장"… 4천년 빈곤의 역사 씻은 車·중공업 신화

3부. 국민기업의 탄생 <1> 탄생과 한계

1976년 현대자동차 울산공장 직원들이 ''포니'' 생산라인에서 차를 조립하고 있다. 국내에서 제작한 첫 자동차인 ''포니''를 시작으로 현대차는 글로벌 5위의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했다.

1987년 이후 폭발했던 노동투쟁은 현재 ''귀족노조''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변질됐다. 현대차 직원들이 시위 중 가두진행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맨손'으로 시작해 단숨에 글로벌 메이커 등극

정부·국민 노력과 맞물려 경제재건 씨앗 역할


수출 부진·노조 파업 등으로 사상초유 위기

난국을 기회로 바꾼 '아산 리더십' 되새겨야


대형선박 건조 인도 2,000척. 현대중공업이 지난 5월25일 세운 초유의 기록이다. 근대 조선산업이 시작된 20세기 이래 세계 각국의 유수 조선사가 100년 넘은 세월 동안 존속해왔으나 이런 대기록을 세운 조선소는 단 한 곳, 반세기도 안 된 현대중공업뿐이다. 2002년 수립된 선박 누적인도 1,000척 기록도 현대중공업의 몫이다. 국민기업을 넘어 글로벌 톱으로 성장한 현대중공업의 궤적에는 정주영 신화가 깔려 있다. 실적을 가진 조선소는커녕 가동되는 조선소도 없이 달랑 부지 사진 한 장과 거북선이 그려진 500원짜리 지폐로 외자를 도입하고 거대물량을 따낸 아산이 뿌린 씨앗은 국민기업을 탄생시키고 울산을 부자도시로 변모시켰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는 예전만 못하다. 시련의 세월이다. 조선뿐 아니라 자동차와 정유시설이 밀집된 중화학공업 도시 울산이 최근 봉착한 정체와 부진의 늪, 나아가 한국 경제를 견인해온 수출 격감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요인 역시 아산이 남긴 정신적 유산에 찾을 수 있다.


'이젠 끝이구나.' 아산 정주영이 회고한 인생 최대의 위기는 1973년 11월. 조선소 건설현장을 독려하려 새벽4시 직접 차를 몰고 가다 거센 비바람 속에 시야가 막힌 상태에서 장애물을 피하는 순간 차가 바다에 빠졌다. 컴컴한 바닷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차 안에서 만 58세의 사업가 정주영에게 엄습한 감정은 '죽음'. 문을 열려 했지만 수압 때문인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던 찰나 머릿속에 이런 생각이 스쳤다. "여기서 이대로 죽으면 실종으로 처리되고 세상 사람들은 '정주영이 턱도 없이 조선업에 뛰어들어 끝내 증발했다'고 수군거릴 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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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여기에 미치자 아산은 마음을 고쳐 먹었다. '여기서 죽지 않는다. 반드시 살아 나간다. 그러러면 우선 침착해지자.' 아산은 문짝은 단번에 뜯어야 살 수 있다고 여겼다. 온 힘을 모아 두 발로 걷어찬 문짝은 거짓처럼 부서졌다. 간신히 차 밖으로 나온 아산은 헤엄쳐 탈출한 뒤에는 추위에 벌벌 떨면서도 '물속이 참 시원하다'며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일해나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아산은 어떻게 초인적인 힘을 내고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었을까.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비결은 세 가지였다. 첫째는 자동차에 대한 해박한 지식. 해방 직후 차량 정비공장인 현대자동차공업사를 운영하다 화재로 태워 먹었지만 자동차의 구조를 익혔다. 차가 가라앉는 동안에도 그는 '어떻게 문짝을 열어도 수압 때문에 다시 닫히면 정말로 끝'이라는 생각에 사력을 다해 문짝을 걷어찼다. 두 번째는 강인한 체력. 70세에도 신입사원들과 씨름을 즐길 정도로 타고난 강골에 강원도 해안가에서 자라 수영 실력도 남달랐다. 세 번째 비결로 아산은 지형에 밝았다는 점을 꼽았다. 거의 매일같이 현장에서 먹고 자며 꼭두새벽에 일어나 한밤중까지 공사를 독려했기에 사고현장의 지형에 대해 누구보다 많이 알았다.

위기에 직면한 아산을 살려낸 세 가지 요소인 지식과 체력·경험은 사업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현대중공업은 전인미답의 금자탑을 세우고 현대자동차는 글로벌 톱5메이커 자리에 올라섰다. 제2의 고향으로 삼았던 울산도 마찬가지다. 울산광역시는 전국을 통틀어 가장 부유한 곳이다. 대한민국 국민 1인당 국민소득은은 3만달러에 못 미치지만 울산광역시의 1인당 소득은 5만달러대 중반을 넘는다.

물론 울산과 현대의 비약적 발전에는 아산뿐 아니라 국민 모두의 땀과 성원이 배어 있다. 특히 산업입국을 기치로 내건 고 박정희 대통령의 선견지명이 크게 작용했다.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 지 8개월 보름여 만인 1962년 울산공업단지 기공식이 열렸다. 울산의 입지조건을 최고로 평가한 장면 정권의 기본구상을 이어받았지만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추진력이 산업입국을 위한 공업단지 조성에 불을 댕겼다. 기공식을 소개한 서울경제신문 1962년 2월3일자에는 '서독의 루르, 미국의 피츠버그를 한국에 실현시키자'라는 제목 아래 '4천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국가 백년대계의 보고(寶庫)을 창조하기 위한 초석'이라는 내용의 기사가 실렸다.

개발연대 초기 목표는 이미 뛰어넘었다. 울산·미포단지로 이름이 바뀐 울산공업단지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독일 루르 공업단지나 미국 피츠버그 공업단지를 앞지른 지 오래다. 당시 서독 정부가 이런 결과를 미리 알았다면 한국에 차관을 주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봉급을 담보로 제공된 서독 정부의 차관은 1960년대 초중반 경제개발에 밑거름이었다. 종합하면 부유한 도시 울산으로 상징되는 한국의 번영은 국민의 땀과 노력·비전을 제시하고 실행한 국가 지도자, 도전과 혁신으로 공장을 세우고 사람을 고용한 창조적 사업가가 결합해 이룬 성과라고 정리할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이다. 아산이 씨앗을 뿌린 울산 미포만의 현대중공업은 대규모 적자 상태다. 이 역시 미증유의 사태다. 현대자동차도 파업으로 국내외 실적이 떨어지는 등 휘청거린다. 울산도 성장이 정체 상태다. 정유업체들도 적자가 늘어나고 있으니 공단 전체의 침체는 당연한 귀결이다. 오랫동안 한국 경제의 심장으로 작동하던 울산공단의 침체는 지역 문제를 넘어 국가적 난제다. 올 들어 수출이 5개월째 감소하고 최근에는 전년 대비 수출 증가율이 마이너스 두자릿수를 기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방법이 없을까. 아산을 조망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죽을 수밖에 없었던 위기를 아산처럼 벗어나려면 지식을 체화하고 강건한 신체를 기르며 현업에 매진하는 길밖에 없다. 국가 리더십도 매한가지다. 말로만 제시하는 비전으로는 백년대계는커녕 현실로 찾아온 난국조차 타개하기 어렵다. 아산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특유의 창조적 사고로 정면돌파하는 동시에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분담을 통해 예상치 못한 성과를 내고 새로운 도약의 기반으로 삼았다. 그 결과가 오늘날의 국민기업들이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국민기업들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탄생 100주년을 맞은 아산의 가르침이 여전히 유효하다. 구성원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의 의지와 소통 노력은 예나 지금이나 발전의 원동력이다. /권홍우 선임기자 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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