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라는 기훈이 있다. 먼저 50집을 짓는 쪽이 반드시 진다는 뜻이다. 승부의 기이한 속성을 말해 주는 잠언이다. 사실은 먼저 50집을 장만한 쪽이 패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러나 포만감에 젖어 졸렬한 작전을 궁리하기 쉽고 그 결과 정말로 패해 버리는 예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다. 이 바둑의 결과가 그러했다. 먼저 50집의 탄탄한 실리를 장만했던 구리가 우물쭈물하다가 박영훈에게 추월당하고 만다. 그 과정은 너무도 교훈적이다. 박영훈의 흑5는 일단 냉정침착했다. 백대마를 잡겠다고 8의 자리에 차단하는 것은 무리. 백에게 바로 5의 자리를 역으로 허용하면 중원이 모두 공배가 될 것이다. 흑9로 틀어막자 중원에는 상당한 흑의 세력이 생겼다. 백10은 우변 흑대마의 사활을 추궁한 큰 수. 흑은 어떤 식으로든 대마를 살려야 한다. 가장 안전하게 사는 수순은 참고도1의 흑1 이하 7로 넘어가는 것이지만 자세가 너무 굴욕적이다. 박영훈은 패를 각오하고 실전보 11로 집어넣었다. 흑13으로도 참고도2의 흑1 이하 7(6은 이음)로 두면 확실하게 살지만 이 코스 역시 상당히 굴욕적이다. 백14는 팻감을 만들겠다는 수순. 백16도 마찬가지. 흑17은 패를 방지한 수. 그러나 백18이 놓이자 중원이 도로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