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탄핵사태 ‘이성의 복원’을

`슬픔도 힘이 된다`고 했던가. 지난 12일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반대하며 울부짖던 국회의원들의 참담한 모습을 보면서 국민들은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힘없이 끌려가며 절규하던 국회의원들의 슬픈 모습에서 폭력적인 거대 야당에 대한 적대감과 힘없는 약자에 대한 동정심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탄핵안 가결 이후 각종 여론조사에서 열린우리당의 지지도는 급상승한 반면 이들 야당에는 차가운 질책만 쏟아지고 있다. 슬픔이 분노가 되어 새로운 파고를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토록 분노의 파고가 증폭된 것은 탄핵사유의 타당성과 정당성에 대한 국민적 동의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탄핵사유도 타당하지 않을 뿐더러 심하게 말해서 일종의 비리집단인 국회가 대통령의 사소한 잘못을 들어 탄핵소추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는 것이 국민 다수의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당이 탄핵안을 의결함으로써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아직 헌법재판소의 심판이 남아 있지만 그 과정이 순탄할 것 같지 않다. 이미 격양된 마음에서 몇 차례 분신과 차량돌진 사건이 발생했고 탄핵소추 찬반세력들간의 격렬한 대립과 갈등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혼란과 대립을 극복할 수 있는 지혜로움일 것이다. 현 상황에서 가장 우려할 점은 자신들의 입장을 도덕적으로 절대화시키는 것이다. 한민당(한나라당+민주당)이 탄핵안 가결을 `의회민주주의의 승리`라고 억지 부려서도 안되겠지만 절차적 정당성을 갖고 있는 국회의 탄핵안 가결을 `의회쿠데타`로 매도하는 것 또한 정치적 슬로건에 그쳐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의견을 존중하지만 소수의 입장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라 했을 때 어느 쪽이건 상대방의 주장을 불온시하는 규범적 주장을 펴는 것은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는 일이다. 상호부정의 상황에서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하다. 쿠데타 세력과 타협할 수는 없지만 탄핵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우리 국민들은 함께 살아가야 한다. 때문에 상대방의 주장을 극단적으로 부정하는 언행은 삼가는 것이 현명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분노의 동원`이 아니라 `이성의 복원`이다. `거리의 정치`는 그것이 가지는 자발적 참여와 지지확산의 매력에도 불구하고 입장이 다른 집단과의 대화와 소통을 차단하는 부정적 효과를 피하기 어렵다. 분명 역사발전에 있어 분노의 힘은 늘 중요한 역할을 해왔지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대화와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관용과 이성의 힘이다. 탄핵에 찬성하는 이들은 인간 노무현에 대한 적의와 불신을 잠시 접어두고 그가 대통령직을 그만둬야 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질렀는가를 냉철히 되새겨봐야 한다. 또한 탄핵을 반대하는 이들도 자신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국민들이 존재함으로 인정하고 `제도로서 국회`가 의결한 것을 부정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인지 고민해야 한다. 노 대통령의 인품에 대한 거부감이 `제도로서 대통령직`에 대한 거부가 돼서는 안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국회의원 개개인에 대한 불만이 `제도로서 국회`의 권능을 무시하는 이유가 돼서는 안된다. 대통령 탄핵 문제가 노 대통령 개인에 대한 친소 혹은 찬반이 돼서는 안되는 이유도 여기서 비롯된다. 논쟁의 핵심은 대통령의 행위가 탄핵당할 만큼 심대한 것인가 하는 점이지, 대통령에 대한 찬반이 아니다. 따라서 현 탄핵정국을 `친노(親盧)-반노(反盧)`구도로 설정하는 것은 타당하지 못하다. 탄핵에 대한 찬반이 친노-반노세력과 결코 겹치지 않을 뿐 아니라 탄핵소추의 정당성에 대한 판단을 노 대통령에 대한 선호와 결부시킴으로써 객관적 판단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탄핵소추에 대한 판단을 진보-보수구도 내로 포섭시키려는 의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비판이 가능하다. 탄핵반대와 진보를 동일시할 수 없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역사에서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는 신념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정의의 이름으로 분열과 갈등을 자초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 탄핵정국에 있어 분노에 찬 격정이 힘이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냉정함 속에서 이성적 사유를 발휘하는 것이 엄정한 시기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 <최영진 (중앙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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