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채 발행이 50조원을 넘어선 것은 세가지 정책목표를 조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과도한 통화채 부담은 지금의 고통을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라는 데 있다. 통화신용정책은 물론 경제전반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현재로서는 별로 뾰족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다. 정부와 한은의 장기적 대응책 마련이 요구된다.◇상반된 정책 목표, 통화채 증가로 대신= 통화채 발행은 기본적으로 늘어날 수 밖에 없다. 무역수지와 자본수지 수지 흑자로 달러 공급 초과상태가 지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시장에 달러가 많아지면 달러 값이 떨어지고 상대적으로 원화가치는 올라간다. 원화절상이 되면, 즉 1,180원대의 환율이 1,160원대로 내려 앉으면 수출경쟁력이 떨어지고 경기회복 자체가 지연되고 위기가 재발할 수도 있다.
이때문에 정부는 세가지 정책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외환위기 재발시 대처할 수 있는 외환보유고의 지속적 확충과 환율절상, 통화증발 압력을 동시에 완화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같은 정책조합이 서로 엇갈린다는 데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보유외환을 늘리고 급격한 환율하락을 막으려면 달러를 사들여야 하는데 달러를 매입하기 위해 원화가 시장에 공급되는 것이다. 결국 시장에 원화가 넘쳐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통화채 발행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같은 정책 목표에 대한 이렇다 할 이견은 나오지 않고 있다.
◇통화정책 경직성 강요받는다= 문제는 과도한 통화채 발행이 통화신용정책의 신축성을 해친다는 것.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는 『통화채 규모가 50조원이라면 통화채만으로 인한 연간 총유동성 증가요인이 1.5~2%에 달한다』고 말했다. 그만큼 정책 탄력성도 제한된다. 가령 가령 내년쯤 물가불안이 가시화할 경우 시중자금을 빨아들여야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많이 발행된 통화채를 또 발행하는데는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통화관리 비용도 점증한다. 통화채이자를 지급하기 위해 찍는 통화채가 전체의 60%에 달하고 있다.
◇엇갈리는 하반기 전망= 앞으로도 달러공급 우위구조는 계속될 전망이다. 최근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투자박람회로 유치된 외자만 최대 6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지난해 국내에 유입된 외국인증시투자자금 53억9,000만달러를 웃도는 것이다. 더욱이 산업생산이 계속 증가하고 설비투자를 위한 자금수요가 살아날 경우 통화관리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중소기업의 자금수요가 살아나고 있는데 이어 지난 5월에는 대기업 대출도 증가세로 돌아섰다. 지금까지 잠자고 있던 국내부문도 통화팽창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이를 막으려면 통화채를 더욱 많이 발행하는 수 이외에 다른 방편이 없는 실정이다.
◇한국은행 입장= 한은은 예상은 이와 다르다. 하반기에는 상반기보다 상황이 호전된다는 것이다. 증시활황으로 올들어 5월까지 약 18억달러가 유입된 외국인 직접투자가 하반기에는 다소 줄어들고 정부재정도 상반기중 집중적으로 집행돼 여유가 생긴다는 기대다. 한은은 또 국내부문의 경기패턴이 이전과는 다르게 작동한다는데 주목하고 있다. 개별기업들이 이전과 같이 무작정 투자를 늘리기 보다 사이즈를 줄이면서 관망하고 있다는게 한은의 판단이다. 5월중 대기업 대출이 다소 증가했지만 CP(기업어음) 등의 발행은 감소해 전체적인 대기업대출이 고개를 든다고 해석하기도 어렵다고 보고 있다.
통화관리 비용과 관련, 내외금리차가 사라져 늘어난 외환보유고 운용에서 발생하는 수익과 상쇄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은은 또 정부가 4월 발표한 외환수급대책에 따라 민간기업의 외자도입이 제한되고 도입하는 경우라도 해외에서 운용하게 돼 큰 문제는 발생치 않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민간기업도 고통= 하지만 기업들도 고통받고 있다. 지난달 24억달러의 해외DR(주식예탁증서)를 발행한 한국통신이 대표적인 케이스. 한은은 이가운데 정부보유 구주매각분 11억2,000만달러를 매입한후 원화를 정부의 한은계좌에 입금시켰다. 통화채 발행도 없었다. 하지만 정부가 재정용도도 이 자금을 집행할 경우 곧바로 통화증발로 연결된다. 나머지 금액, 즉 신주발행분 12억8,000만달러를 외환은행 뉴욕지점 등에 예치하고 있는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한통관계자는 『DR 발행 목적은 국내외에 사업용도에 쓰려는 것이었지 해외에 예치하기 위함이 아니었다』며 불만을 토로했다. 민간기업이나 해외매각이 예정되어 있는 다른 공기업들도 비슷한 고충을 겪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대안은 없나= 단기적으로 통화채문제를 해소하기 어렵다. 통화채 발행을 강요하는 정책목표들이 하나같이 소중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한은은 대기업은 물론 중소기업들의 재무구조가 건실해지고 해외투자 여건이 성숙될 때 통화채발행고를 점진적으로 줄여나갈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재경부는 재정적자가 심화한 상태에서 현실화하기는 어렵지만 장기적으로 국채전환와 만기구조 다양화, 해외시장상장 등을 검토하고 있다. 금융연구원 관계자는 『저금리기조가 정착되고 해외시장에서 유통될 수 있다면 통화채의 국채 전환도 적극 고려해볼만 사안』이라고 말했다. /권홍우 기자 HONGW@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