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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재정위기가 다시 불거지면서 원화가치가 떨어지고 수출∙무역 수지 등 거시지표도 적신호를 보내고 있지만 마땅한 통화∙외환 정책이 없어 정부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뾰족한 정책조합(policy mix)이 없는 딜레마에 빠진 형국이다.
정부는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해 17일 비상금융상황점검회의를 열기로 했지만 시의 적절한 대응책이 나올 것으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정부가 원화가치 하락(환율상승)을 방어해야 하지만 제동이 걸린 수출을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공격적인 시장개입도 어렵다. 또 경기부양을 위해서는 기준금리를 인하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제기되고 있지만 오는 7월에는 이란산 원유의 수입이 중단돼 국제유가가 상승할 가능성도 있어 통화완화 정책을 구사하기도 힘들다.
이날 국내 금융시장은 외국인들의 대량 투매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외국인이 4,000억원가량의 주식을 처분하면서 코스피지수는 60포인트 가까이 급락했고 환율은 1,160원선이 무너졌다.
우리나라 주식과 채권 시장에서 외국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각각 32%∙7%지만 시장영향력은 절대적이다. 특히 2000년대 자본자유화 시행 이후 국내에 들어온 외국인 자본의 85%가 주식∙채권 등 수시입출입성 자금일 만큼 투기자본이 대량으로 밀려오면서 우리 금융시장의 취약성은 더욱 커졌다.
문제는 정부가 지난해 자본유출입 규제를 위해 3종 세트 정책을 내놓았지만 사정은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특히 이번 금융시장 불안은 실물경제에도 직격탄을 날릴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 그리스 사태가 원만히 해결되지 못하고 유로존 탈퇴라는 파국으로 치달을 경우 유럽시장에 자금경색이 본격화되면서 우리나라 수출이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
전문가들은 최악의 경우 정부가 외환시장 개입에 나설 것으로 전망하고 있지만 강도는 제한적일 것으로 보고 있다. 한 외환 전문가는 "점진적인 환율상승은 수출기업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지만 높은 환율 변동성은 기업들에도 마이너스 요인"이라며 "또 정부가 환율상승을 방치할 경우 추가 상승을 예상한 투기꾼들의 원화매도를 부추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통화정책을 담당하고 있는 한국은행도 깊은 고민에 빠졌다. 김중수 한은 총재는 지난 10일 기준금리 동결 직후 "금리정상화 기조에 변함이 없다"며 금리인하 가능성을 일축했다. 하지만 불과 열흘도 안돼 금융시장이 혼란에 빠지면서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게 됐다. 당시 김 총재는 "유럽 사태가 원만히 해결될 것으로 예상되며 국내시장에 미치는 영향도 제한적일 것"이라고 단언한 바 있다.
2010년 하반기 과감히 금리인상에 나서야 할 때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등 정치 일정 탓에 금리인상을 주저해 시장의 질타를 받았고 이번에는 국제금융시장 혼란을 예측하지 못해 '금리정상화'를 운운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 경제 전문가는 "한은이 물가도 잡지 못하고 시장불안에도 대처하지 못하는 난맥상을 보여줬다"며 "최악의 경우 금리인하 카드를 꺼내 들 수 있지만 이 경우 한은이 물가를 포기했다는 비난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