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65년 한 육군 장교가 공산주의자들의 쿠데타를 막기 위해 휘하 장병을 모았다. 이 장교는 일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수카르노 당시 대통령에 이어 최고 권력자로 등극한다. 그가 바로 어제 지병으로 사망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이다. 향년 86세. 32년간 인도네시아를 집권했던 수하르토의 통치 슬로건이라 할 ‘안정’은 축복인 동시에 저주 같은 것이었다. 수하르토 정부는 1만7,000여개의 섬과 좀처럼 융화되기 어려운 수백개의 소수 민족 그룹으로 구성된 인도네시아를 한데 묶는 힘을 가졌다.
인도네시아인들은 캄보디아와 베트남과 달리 조국의 공산화를 막은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지만 안정은 피의 대가였다. 수하르토 1965~1966년 공산주의자를 숙청한다는 이유로 수십만명을 학살했으며 중국 출신 소수 민족도 탄압했다. 또 동티모르인들은 1970년대 잔인한 탄압을 견뎌야 했다. 그는 경제를 살려야 국가 통합이 가능하다는 점도 꿰뚫고 있었다.
미국에서 교육받은 인도네시아 경제학자를 뜻하는 ‘버클리 마피아’ 그룹을 바탕으로 경제개발 계획을 수립했다. 덕분에 외국인 투자를 적극 유치했으며 농업을 근대화할 수 있었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인도네시아의 국내총생산은 1965년 195달러에서 1995년 827달러로 늘었다.하지만 경제 전반에 대한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통치는 권력층의 독점, 부패로 이어졌다.
수하르토는 개인적으로 소유한 기업들과 자선기구 등을 통해 수십억달러에 달하는 돈을 착복한 것으로 추산된다.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나라인 인도네시아가 한국이나 대만ㆍ싱가포르 등보다 뒤쳐지게 된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그는 다른 독재자처럼 후계 문제를 논의하는 것을 금기시했고 결국 인플레이션이 극에 달했던 1998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 때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인도네시아는 이제 여러 정당들을 갖고 있고 4번의 대선도 무난히 치루는 등 민주주의가 정착되고 있으며 동티모르를 비롯해 이웃 나라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하지만 수하르토 집권의 유산으로 사회 전반에 부패는 만연돼 있다. 그는 인도네시아를 혁명에서 구했지만 국민들의 잠재력을 일깨워 자유롭고 활력이 넘치는 국가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