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산업일반

[상생은 소통에서] <하>'게임의 룰'을 지켜라

정부역할 외면한 채 대기업에 일방 강요 "경제질서 교란"



"적자나도 값 내려라" 식 압박
물가는 못잡고 경영에만 부담 자생력 없는 中企까지 과보호
도덕적 해이·경쟁력 악화 불러 '시장·부의 몫' 명확히 구분
인기보다 기본 원칙 충실해야
지난 21일(현지시간) 네바다주 리노에서 열린 타운홀 미팅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치솟는 기름 값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는 "기름 값을 끌어올리는 불법이나 투기행위를 뿌리 뽑기 위해 법무부에 범부처 특별조사팀을 구성하도록 했다"고 밝혔다. 겉으로 보기에는 올 1월 이명박 대통령이 "기름 값이 묘하다"고 발언한 후 기름 값 잡기에 전력투구했던 한국 정부의 판박이처럼 보인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 행정부가 가는 길은 판이했다. 오바마 대통령이 겨냥한 것은 투기세력이었다. 정유사를 향해 석유제품 공급 가격을 낮추라는 식의 반시장적 행태는 없었다. 이어 오바마 대통령은 이틀 뒤인 23일 인터넷·라디오 주례연설에서 "유가가 시시각각 오르자 카메라 앞에 나가 반값 유가를 떠벌리는 정치인이 나오고 있다"며 "그러나 당장 유가를 떨어뜨릴 요술방망이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오바마 대통령은 40억달러에 달하는 석유회사 보조금을 대체에너지 개발에 투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오바마 대통령의 발언을 듣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미국은 공정거래이론이 발달, 정립된 나라일 정도로 독과점 구조를 용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장교란 행위를 엄격히 단죄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통신기업인 AT&T나 세계적 IT 업체인 마이크로소프트에 대한 반독점 제재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런 미국이지만 석유회사들을 향해 기름 값을 내리라고 강요하는 일은 없다. 자유시장 체제를 부정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지난 3개월여의 물가전쟁은 산업계에 큰 후유증을 남겼다. 무엇보다 시장원리, 즉 '게임의 룰'이 깨져버렸다. 이윤추구가 주된 목적인 기업에 '적자를 내더라도 제품 가격을 낮추라'는 정부의 메시지는 충격 그 자체다. 2ㆍ4분기 예상 영업이익 규모가량을 기름 값 인하에 쓴 정유업계는 당초 세웠던 경영계획을 대폭 수정해야 했다. 투자와 자금조달 플랜도 다시 짰다. 중장기 설비투자 호흡을 갖고 있는 업계 특성상 악영향은 나중에 증폭돼 나타날 공산이 크다. 정부의 기름 값 강제 인하는 시장에도 악영향을 미친다. 제품 가격이 오르면 소비가 줄거나 대체소비가 늘어나도록 하는 시장의 가격조절 기능이 왜곡된 것. 향후 고유가가 지속될 것이 뻔하지만 중대형차 판매가 더 늘어난 게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준 셈이다. 더욱 큰 문제는 기업이 희생되고 시장도 교란됐지만 기름 값 인하 효과는 거의 없다는 점이다. 이선화 한국경제연구원 부연구위원은 "경제적 현상을 심증적으로 접근해 유죄 판결하고 경제질서를 교란하기보다는 문제를 경제적으로 이해하고 이성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며 "더구나 전시(戰時)도 아닌 상황에서 금리와 같은 거시적 조절수단이 아닌 개별 제품가격에 대해 행정지도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민심 잡기에 급급한 전시 행정은 아닌가라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고 말했다. 시장원리를 무시하는 포퓰리즘 정책은 중소기업적합업종 추진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경제적 약자인 중소기업을 보호하고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명제에 반대할 이는 없다. 그러나 자생력 없는 한계기업까지 보호하던 중소기업고유업종 제도는 수혜기업의 도덕적 해이를 초래했다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이름만 바꿔 등장한 '중소기업적합ㆍ품목제도'가 미칠 폐해도 간단하지 않다. 소비자 효용을 떨어뜨리는 것은 물론 중소기업 간 과당경쟁을 유발, 기술 및 품질의 저하가 불 보듯 뻔하다. 중소기업학회에 따르면 고유업종제도가 시행되고 있는 1991년부터 2001년 10년간 고유업종의 생산액 및 부가가치가 각각 12.6%와 11.6%에서 8.3%와 7.7%로 떨어진 것이 이를 증명한다. 김정호 자유기업원장은 "지난 30년간 중소기업 육성이라는 명분 아래 보호 받던 업종과 기업 가운데 현재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며 "정부의 보호 아래 나약해진 중소기업들은 계속 지원 받기 위해 성장을 꺼리고 이 사이 해외 유명기업들이 국내 중소기업 고유업종 시장을 잠식하는 결과만 가져왔다"고 비판했다. 정부가 밀어붙이고 있는 초과이익공유제, 동반성장 정책, 연기금 주주권 행사 강화 등도 사사건건 시장경제 체제와 충돌을 빚고 있다. 끊이지 않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악수를 연발하는 데 대해 재계와 학계는 우려를 넘어 절망감을 느끼고 있다. 조동근 명지대 교수는 "이명박 정부가 '시장의 몫'과 '정부의 몫'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며 "인기만 좇지 말고 이제라도 시장경제의 근본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충고했다. 윤상호 채프먼대 교수는 "사회적 갈등의 소지가 많은 현안들이 산재한 지금이 원칙에 충실한 경제적 사고와 인식으로 전환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하는 시점"이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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