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2일은 희비가 엇갈리는 날이다.
일본이 항복문서에 조인, 패망한 것을 지켜보면서 남북 분할점령 결정에 따른 분단의 아픔을 함께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남과 북이 갈라진 지도 벌써 60년이나 지났다. 짧다면 짧지만 길다면 무척 긴 세월이다.
우리 민족이 남북으로 갈리는 불행과 비극은 미국과 소련의 어이없는 분할점령 결정으로 시작됐다.
이날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 양군이 한국을 분할점령한다고 발표했다.
미국과 소련의 한반도 분할점령 합의는 이미 그해 7월26일 포츠담회담에서 밀약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8월10일 일본이 연합군 측에 항복의사를 밝혀옴에 따라 미 국무부 육해군합동조정위원회(SWNCC)는 8월13일 포츠담회담에 의거, 38도선 분할점령안을 해리 트루먼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트루먼은 이를 받아들여 그날로 소련에 통보했고 소련도 즉각 수용의사를 밝혔다. 정작 당사국인 우리는 배제된 채 강대국의 결정에 아무 소리도 못하고 따라야만 했다. 힘없는 약소국의 설움이었다.
8월8일 뒤늦게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한반도에 침공한 소련군은 이미 북한에 진주해 있었고 미군은 한달 뒤인 9월8일 남한에 들어왔다.
이렇게 시작된 남북 분단은 60년이 지난 지금도 요지부동이다.
한반도가 남북으로 조각나는 이날 일본은 요코하마에 정박한 미 전함 미주리호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는 치욕을 맛봐야 했다.
이미 8월15일 라디오를 통해 울려 퍼진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는 패전과 항복을 알리는 조곡이었다.
태평양전쟁의 종지부를 찍은 항복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은 시게미쓰 마모루 외무장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