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7년부터 2001년까지 닛산생명, 도쿄생명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7개 보험사들이 줄줄이 쓰러졌다. 90년 전후 일본 경제버블 붕괴로 시작된 저성장, 저금리 시대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지난 70년~80년대 고금리를 약속하고 팔았던 보장, 연금 상품의 만기가 돌아왔지만 10년 가까이 계속되는 초저금리로 운용수익이 나지않아 내어줄 곳간이 텅 비어버렸기 때문이다. 이른바 이차(利差)역마진의 역습에 백기를 든 셈이다. 약속된 보험금과 환급금을 받지 못하는 고객이 발생하는 등 후유증이 엄청났다. 당시 재정적자 늪에 빠진 일본 정부는 이들 고객 고금리 상품을 일부 대지급하고 해당 보험사를 파산시켰다.
한국도 저성장·저금리 기조가 고착화하면서 일본 보험 시장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이차역마진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다.
이미 생명보험사는 2010년부터 고객에게 향후 내줘야 할 적립금 부담 이율이 운용자산이익률을 지속적으로 웃돌고 있다. 2000년대 초반까지 10%대의 높은 확정 금리로 팔았던 상품들이 이들 생보사를 짓누르는 것이다.
하지만 위기는 기회다. 경영 환경 패러다임 변화에 맞춰 전략을 재설정할 경우 새로운 시장을 열며 재도약의 기회가 올 수 있다.
특히 100세 시대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 질병 보장 수요가 커지는 것은 물론 장수 리스크에 따른 연금 수요가 늘어나고 있다. 정부가 이번달 내놓은 금융 경쟁력 강화 방안의 핵심은 '100세 시대 신금융 수요 창출'이고 그 중심에는 보험산업이 있다.
◇100세 시대 상품으로 금맥 캐야=저축성 보험, 암보험 등 천편일률식 상품에서 벗어나 노인 전용 소액 실손보험 등 100세 시대의 신금융상품 발굴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강조한다.
이태열 보험연구원 고령화연구실장은 "국가 재정 부족으로 건강보험·국민연금 등 공적 보험의 보완 체제로서 사적 보험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다"며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없는 급속한 고령화 진행으로 사적 보험의 성장 잠재력이 크다"고 진단했다.
현재 우리나라 건강보험의 보장률은 63%(2011년 기준)로 나머지 35%의 의료 비중은 민영보험이나 상당수가 개개인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
국가가 제공하는 노인장기요양보험도 노인 인구 대비 수혜자 비율이 5.7%(2011년 기준)에 그치고 있다. 고령화에 따른 국가 재정 급증 부담 때문에 보장 수요의 상당 부분이 민영 시장에서 충족될 수밖에 없다.
금융연구원의 이석호 박사는 "프랑스 악사 생보사는 일하는 30~40대 싱글 여성을 대상으로 시장 조사 및 상품 개발에 주력해 미혼 여성이 가장 불안해하는 질병인 암과 이로 인한 휴직 및 수입 감소 위험을 보장하는 '악사 소득 보장 암보험'을 출시해 인기를 끌었다"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위험 보장 수요 등에 맞춰 신금융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영 환경이 이처럼 급변하는데도 보험사들은 근본적인 경영 전략 재설정보다는 단기 실적에 연연하는 과거 행태를 답습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지난해 즉시연금 절판 마케팅에 경쟁적으로 나서며 단기간에 수입 보험료를 끌어올린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질병 보장의 신규 수요와 함께 100세 시대를 맞아 연금 시장도 떠오르는 양대 시장이다.
국가 재정 한계가 드러나면서 국민연금의 소득 대체율은 설립 당시 70%에서 40%로 떨어졌다. 금융연구원에 따르면 노후 소비지출 대비 예상 연금소득은 젊은 층일수록 줄어들어 노후 대책이 시급한 것으로 나타났다.
연금소득 부족분은 60세는 18% 수준이나 50세는 15%, 40세는 32%, 30세는 41%로 젊을수록 노후 준비가 열악한 것으로 나타났다. 공적 연금의 한계를 감안하면 이는 퇴직·개인연금 등 사적 연금 시장의 성장 가능성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실제 개인연금의 가입률은 21%에 불과하다.
영국의 표준하체 연금(substandard annuity)처럼 개인의 건강 상태 등을 고려해 연금액이 조정되는 연금 등 특정 그룹에 맞는 다양한 상품을 개발해 신규 수요를 창출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정부도 규제 완화, 성장 기반 조성 나서야=정부도 금융산업 경쟁력 강화 방안의 핵심으로 '100세 시대 신금융 수요'를 표방한 만큼 그에 걸맞은 제도적 성장 기반 조성에 나서야 한다. 정부가 최근 연금 시장 활성화 등 보험산업 성장 비전을 제시했지만 정작 알맹이는 빠졌다는 지적이 있다. 지난 여름 세법개정안에서 정부는 중산층에 대한 연금 소득공제 폭을 줄이면서 연금 시장 활성화 흐름에 찬물을 끼얹은 바 있다. 이번달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금융 경쟁력 강화 방안에서 중산층에 대한 연금 소득공제 확대, 저소득층 대상 정부 보조금 지급 연금상품 등이 나올 것으로 기대됐지만 추후 논의 사항으로 미뤄줬다.
소관부처인 금융위는 이 같은 제도적 지원 방안을 추진했지만 재정 운용을 맡은 기획재정부가 세수 감소를 우려해 난색을 표했기 때문이다. 청와대가 직접 컨트롤타워를 만들어 부처 간 이견 조정에 나서고 연금 시장을 제도적으로 키워나가겠다는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이 박사는 "연금상품에 대한 세제 혜택으로 단기적 세수 감소가 발생할 수 있으나 이는 개인의 노후 연금자산 확대와 국가 노후 복지 비용 감소로 이어져 중장기적으로 재정 수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동태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시장 자율과 보험산업 발전을 외치면서 뒤로는 보험료 개입에 나서는 당국의 관행도 문제다. 적자에 시달리는 자동차보험료를 꽁꽁 묶어두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예다. 내년부터 국제적으로 보험 자본의 건전성 규제 강화 등으로 보험사별로 자본 확충에 나서야 하는데 지나친 보험료 규제는 금융사의 제일 기본인 재무 건전성을 악화시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