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청년들이 앓고 있다] 1부:위기의 세대 <3> 일본 청년 구인난의 역설

"취업도 소비도 관심없다"… 장기불황에 '사토리 세대' 급증

경기부양에 일자리 늘었지만 대부분 임시직

"미래 불투명" 술 안마시고 결혼·연애도 미뤄

저출산·고령화 이어져 경제 기반마저 위협




지난달 말 방문한 일본 도쿄시 미나토구의 헬로워크(정부가 운영하는 실업자 재취업 지원기관)는 텅 비어 있었다. 구인광고가 빼곡히 붙어 있었지만 보는 사람은 없었다. 헬로워크뿐 아니라 도쿄 시내 곳곳에는 일할 사람을 모집하는 광고가 넘쳐났다. 구인난에 몸살을 앓는 일본의 풍경이다.

일손이 모자라면 임금도 오르고 소비도 늘어야 하지만 일본의 소비경기는 여전히 위축돼 있었다. 같은 날 도쿄 대학가 근처인 오키쿠보역 앞 와타미(일본 주점 체인)는 저녁시간임에도 매우 한산했다. 20개 가까운 테이블 중 자리를 채운 것은 서너 개뿐이다. 점원은 "주고객인 젊은 층의 술 소비가 적은데다 일반 맥주보다 저렴한 발포주를 선호해 매출이 줄 수밖에 없다"고 토로했다. 인근의 또 다른 와타미 지점은 바로 얼마 전 문을 닫았다. 일본의 대표적 주점 체인인 와타미는 지난 1996년 상장 이후 올해 첫 적자 전환했다. '아미타로' '하나노마이' 같은 다른 주점 체인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일본 주류업계는 청년들의 지갑을 열게 만들 방법을 찾느라 고심하고 있다.


◇소비하지 않는 청년, 사토리 세대=최근 일본에서는 청년층을 일컫는 '사토리 세대'라는 신조어가 유행하고 있다. 지난해 일본에서 빅데이터 등과 함께 인터넷 유행어 대상 후보에도 올랐던 이 말은 원하는 게 없는, 즉 소비가 없는 '득도(得道)'한 세대라는 뜻이다. 이 문제를 처음 제기한 일본 언론인 야마오카 다쿠는 "요즘 청년들은 자동차를 몰지 않으며 술도 마시지 않는다. 명품·여행·스포츠에도 관심이 없고 연애나 직업적 성공에도 소극적"이라고 사토리 세대의 특성을 정리한 바 있다.

일본 총무성에 따르면 지난해 29세 미만 성인의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은 27.1리터로 40~49세(54.3리터)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2000년 417만명이었던 20대 해외여행자 수는 본격적인 엔저가 시작되기도 전인 2012년 294만명으로 감소했다. 18~24세 면허 취득자 중 실제로 운전하는 비율은 1999년 74.5%였으나 2007년 62.5%로 감소했다고 일본자동차공업회는 집계했다.


명문대인 국립 히토쓰바시대에서 금융을 전공하는 석사 2년차 K(25)씨도 사토리 세대다. K씨는 손꼽히는 대기업에 들어가 몇 년 안에 연봉 1,000만엔(약 1억원)을 바라볼 수 있는 엘리트다. 그런 그도 "취직 후 자동차를 산다거나 결혼해 자식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별로 들지 않는다"고 했다. K씨는 "주위에도 될 수 있는 한 소비를 줄이려는 친구가 많다. 기성세대보다 소득이 적은 젊은 세대로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일본 정부가 발간한 '2014 어린이·청년 백서'에 따르면 한국·일본·미국 등 총 7개국에서 13~29세 남녀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 결과 일본인은 '자기 자신에 대한 만족도' 및 '장래에 대한 희망'에서 모두 최하위를 기록했다.

관련기사



◇좋은 일자리 사라져=올해 5월 기준 일본의 청년실업률은 8.7% 정도다. 25%에 가까운 유럽에 비하면 한결 나은 수준이다. 하지만 하루키 이쿠미 도요에이와여대 사회학 교수는 "청년들의 상당수는 최저임금(약 850엔)과 열악한 근로조건으로 악명 높은 블랙 기업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한 게 현실"이라며 "실업률이 낮다고 해서 좋은 일자리가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얼마 전 일본 외식 체인 대기업인 스키야에서는 젊은 아르바이트생들이 열악한 근로조건에 항의해 단체로 퇴사하면서 사회적으로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전문가들은 1990년대 초 버블 붕괴와 뒤이은 장기 디플레이션(물가하락 및 경기침체)에 빠진 일본 경제가 구조변혁 대신 정부가 대규모 토목공사·통화완화에만 의지한 경기부양에 매달리는 사이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졌다고 지적한다. 수익성이 악화된 기업들이 비정규직 비율만 늘린 탓이다. 총무성에 따르면 현재 5,500만명에 이르는 일본 근로자 가운데 비정규직은 약 2,000만명에 달한다. 세계적 가족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 주오대 교수는 "요즈음 늘어난 일자리도 건설일용직 같은 임시직이 대부분"이라며 "이는 청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도쿄 스기나미구에 살며 임시 사무직으로 근무하는 이노우에 아키라(26·여)씨. 아직 미혼인 그는 "종합직(일본의 정규직)이 아니라 혼자 생활을 꾸리기도 빠듯하고 경력을 쌓기도 어렵다"며 한숨을 쉬었다.

◇일본 경제의 짙은 그림자=청년의 무기력과 고독·고립은 당장 내수시장에 직격탄이 되지만 장기적으로는 저출산·고령화 문제를 심화시켜 일본 경제의 토대를 갉아먹는 더 큰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하루키 교수는 "현재 일본이 겪는 구인난은 그만큼 청년이 귀하다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결국 구인난은 경기호황이 아니라 청년감소 문제가 위험수위에 달했다는 신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해 일본에서 성인(만 20세)이 된 인구는 122만명으로 1970년(246만명), 1994년(207만명)의 반토막 수준이다. 그러는 사이 65세 이상 노인 인구는 3,200만명으로 일본인 4명 중 1명꼴이 됐다.

겐다 유지 도쿄대 경제학 교수는 "청년들의 사회적 박탈감과 고독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결혼·출산이 더욱 줄고 있다"고 우려한다. 그는 지난 10여년간 20~59세 인구 중 직업도 없고 어떠한 사회적 관계도 맺지 않는 '고립 무직자'가 급증하는 데 주목했다. 겐다 교수에 따르면 2000년대 중반 100만명을 돌파한 일본 내 고립 무직자는 2011년 162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된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는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하는 인구가 급격히 늘고 있다. 1980년 남녀 각각 2.6%, 4.5%였던 생애미혼율(50세까지 한 번도 결혼하지 않은 인구 비율)은 2010년 20.1%, 10.6%로 뛰었다. 지난해 가임여성 1인당 평생 출산율은 1.43명으로 1.25명까지 떨어졌던 2005년에 비해서는 소폭 올랐지만 베이비붐 세대 여성들의 고령임신으로 인한 일시적 현상이라는 게 대다수 분석이다. 야마다 교수는 "절망한 청년 세대는 수적으로도 밀려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지 못한 채 소비를 줄이고 결혼을 늦추는 식으로 사회에 적응하고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