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제일제당연 수석연구원 이철훈 박사(이달의 과학기술자상)

◎흙속 미생물 이용 질병정복 공헌이철훈 박사(제일제당그룹 중앙연구소 수석연구원)는 땅투기꾼이다. 지난해까지 땅을 보기 위해 1년에 4∼5번씩 전국을 누볐지만 올해들어 한두달에 1번꼴로 돌아다닌다. 지금까지 남한의 섬지역을 제외하고는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거의 없다. 『땅만 파면 뭐하나. 1백원짜리 동전 하나 안나온다』는 핀잔은 그의 귀에 들리지 않는다. 『땅을 잘 파면 수천억원이 나올 수도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가수 송대관씨의 「쨍하고 해뜰 날」을 즐겨 부른다. 정확하게 말하면 이박사는 「흙투기꾼」이다. 땅 투기가 아니라 흙을 연구한다. 좀더 정확한 표현은 흙 속의 미생물이 분비하는 물질을 연구하는 것이다. 지난 87년 물질특허를 도입하면서 우리나라에서 신물질에 대한 연구가 본격 진행되기 시작했다. 이박사는 이 신물질을 찾기 위해 흙을 뒤지고 있다. 토양 미생물을 탐색하는 작업은 「토양 채취여행」이라 불린다. ◎그는 누구인가/신물질 발견위해 일부러 ‘더러운 곳’ 골라/88년부터 전국곳곳 돌며 흙 70만덩이 채취/국내­23건 국제­4건의 특허등록·저서 업적 그는 한번 여행을 떠나면 20㎞마다 흙을 떠낸다. 표면 5㎝는 걷어내고 5∼10㎝ 깊이의 흙을 한 웅큼씩 뜬다. 2∼4일 동안의 여행에서 약 7백덩이의 흙을 채취한다. 지금까지 그는 전국 각지에서 약 70만 덩이의 흙을 파 모았다. 난지도 같은 쓰레기장을 비롯하여 호수·동굴·하수처리장·분뇨처리장 등 흙이 있는 모든 곳, 아니 곰팡이나 세균이 우글거리는 모든 「더러운」 곳은 그에게 신물질을 발견하는 「성지」가 될 수 있다. 그는 한국의 토속 미생물에서 세계적인 경쟁력을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서 송이밭·인삼밭·대나무 숲·군사분계선과 같은 우리나라의 고유한 지역을 찾아 다니기를 좋아한다. 그는 채취한 흙 속에 살고 있는 수없이 많은 미생물을 분리하여 어떤 미생물이 인간에게 유익한 신물질을 만드는가를 판단하고 학계에 이미 보고된 것인지 확인한 뒤 성능과 안전성을 검증하는 작업에 들어간다. 2만∼3만 종류의 미생물을 탐색하면 겨우 1∼2개의 유망한 미생물을 발견하지만 이것이 유용한 신물질을 만들어낼 확률은 10% 미만이다. 10만분의 1도 되지 않는 확률이다. 곧 이 탐색작업은 결국 얼마나 행운이 따르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고 지나치지 않다. 이박사는 『이 행운이 경쟁력이다』고 주장한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소풍가서 보물찾기에서 한번도 보물을 찾은 적이 없지만 유학시절 「검은 표범」 꿈을 꾸고난 뒤 새로운 유전자나 신물질을 잇달아 발견하는 행운을 만끽하고 있다. 지난 86년 남성 불임 유전자를 발견한데 이어 한달에 하나꼴로 쥐(Mouse·Rat)와 황소의 수컷 불임 유전자를 잇달아 찾아낸 것은 물론 토양 미생물에서도 여러 신물질을 발굴한 것은 상당히 드문 행운이다. 이에 이박사는 산삼을 캐는 심마니의 마음으로 곰팡이나 세균을 바라본다. 토양 채취여행을 다니다보면 왠지 모르게 끌리는 지역이 있다. 여행을 떠나는 전에 「검은 표범」 꿈과 같은 계시를 기다리기도 한다. 흙을 뜨는 순간 심마니처럼 경건함을 느낀다. 이 때문에 이박사는 한번 떠온 흙은 버리지를 못한다. 흙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결국 애꿎은 화분을 비워 그 속의 흙을 버리고 실험이 끝난 흙을 채워 넣는다. 이박사는 독일 유학시절 남성 불임 단백질인 「프로타민」을 규명한 뒤 이것을 남성 피임약으로 개발하면 막대한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지도교수에게 의사를 타진했다가 호되게 야단맞은 기억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 『우리 연구는 아기를 갖게 하는 연구이지, 아기를 못갖게 하는 연구가 아니다』는 지도교수의 호된 질책이 그의 뇌리에 생명에 대한 깊은 경외심을 심어놓은 것이다. 『과학자는 죽어서 논문을 남긴다』는 그는 지금까지 20여편의 국제 논문, 10여편의 국내 논문, 23건의 한국 특허와 4건의 국제 특허 등록, 25건의 국제 특허 출원 등 젊은 과학자로서 탁월한 업적을 보이고 있으며 「재미있는 유전자 이야기」를 번역, 출간하기도 했다.<허두영 기자> ◎연구 뒷얘기/독서 남성불임 연구중/꿈속에 검은 표범 출현/문제해결 날짜 등 계시/구조원인 밝히는 행운 지난 86년 독일 괴팅겐대 인간유전학연구소에서 박사학위를 받기위해 막바지 연구에 땀을 쏟던 이철훈 연구원은 한밤중에 실험실 건너편의 암실에서 인기척이 나는 것을 느꼈다. 당시 이연구원은 남성에게 불임을 일으키는 유전자를 규명하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었다. 그때까지 그는 이 유전자를 발견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X선 필름을 현상하여 검은 반점이 나오면 이 유전자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는 X선 필름을 현상할 때마다 이 검은 반점을 기다렸지만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이연구원이 이상하다고 여기며 인기척이 난 암실의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암실에는 X선 필름을 보관하는 냉장고가 있다. 유전자를 찍은 X선 필름은 영하 80℃의 저온에서 보관한다. 방의 불을 켜고 둘러보던 그는 깜짝 놀랐다. 냉장고 옆 책상 위에 검은 표범이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그는 바로 옆에 있는 바가지로 냉각수의 물을 퍼 표범에게 끼얹으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몇번이나 물벼락을 맞던 검은 표범은 천천히 일어나 창 쪽으로 가면서 독일 말로 무겁게 말했다. 『네가 그러지 않아도 나는 이번 목요일이면 떠난다.』 꿈이었다. 그러나 꿈이라고 하기엔 너무 생생했다. 그는 지금도 그 꿈을 회상하면 머리털이 쭈뼛해지는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주말에 그 꿈을 꾸고난 며칠 뒤, 냉장고에서 X선 필름을 꺼내던 그는 갑자기 꿈 생각이 났다. 달력을 보니 목요일이다. 검은 표범이 떠난다던 바로 그 목요일. 그는 표범이 앉아 있던 암실의 책상에서 X선 필름을 현상하면서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필름에 새까만 반점이 나타났다. 드디어 남성 불임 유전자를 발견한 것이다. 꿈 속의 검은 표범이 필름의 검은 반점과, 또 물을 뿌리는 행동이 필름을 현상하는 작업과 무슨 연관이 있었던 것일까. 그리고 표범이 떠난다던 요일과 유전자를 발견한 요일이 일치한 것은 얼마나 신기한가. 이윽고 그는 남성 불임의 원인 가운데 하나인 「프로타민」이라는 단백질의 구조를 밝히고 그 유전자의 구조와 발현 기전을 세계 처음으로 규명했다. 그리고 88년 박사 학위를 받을 때 외국인으로는 드물게 최우 등 졸업의 영광을 안았다. ◎연구 업적/인체·환경에 전혀 무해/레지오넬라 살균소독제/천연 생물농약 등서 로봇 탐색시스템 개발/스위스 등 외국제약사 상품화추진 제의까지 이철훈 박사는 지난 92년부터 과기처의 선도기술개발사업(G7 프로젝트)으로 국립보건원·생명공학연구소와 공동으로 레지오넬라 천연살균제 개발에 착수, 최근 「AL072」라는 신물질을 추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신물질은 이박사가 지난 94년 포항지역에서 채취한 흙에서 분리한 「스트렙토마이세스」라는 방선균이 분비하는 물질로 많은 세균과 곰팡이 가운데 레지오넬라균만 골라 죽이는 독특한 성질을 갖고 있다. 또 0.2PPM의 매우 낮은 농도로도 일반 냉각수에 서식하는 레지오넬라 양의 1백배의 균을 박멸하는 탁월한 효과를 보인다. 그러면서도 인체나 환경에 아무피해를 끼치지 않는 우수한 특성을 자랑한다. 이박사는 이 신물질로 지난 4월 대형 건물 냉각수용 천연 살균소독제 「레지오­프리」를 개발한데 이어 오는 11월 대형 병원용 및 가정용 가습기 살균제, 내년 3월 가정용 살균 스프레이 제품을 상품화할 예정이다. 레지오넬라 천연 살균소독제는 선진국이 관심을 갖지 않는 틈새 시장으로 지금까지 수입하던 화학 살균제를 연간 1백50억원 상당을 수입 대체하고 앞으로 4백억원 상당의 세계시장을 형성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이박사는 지난 94년 충북 문촌지역에서 곰팡이를 죽이는 새로운 구조의 「슈도모나스」라는 녹농균을 발견했다. 이 녹농균에서 추출한 신물질이 「세파시딘 A」다. 이 신물질은 성능이 너무 강력하여 거의 모든 곰팡이를 죽이지만 인체나 환경에 대한 안전성을 해결할 수 없어 이박사는 한때 상품화를 포기할 생각을 품었다. 이에 한 스위스의 제약기업이 이 신물질로 환경친화적인 천연 생물농약을 공동 개발할 것을 제의함에 따라 이박사는 오는 10월까지 연구를 마무리짓고 내년 여름께 미국의 대규모 목화 농장에서 현장시험을 수행할 예정이다. 이것이 성공하면 한국에서 첫 천연물 기술수출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이박사는 토양 미생물을 탐색하는 과정이 단순작업으로 많은 시간을 빼앗김에 따라 지난해 삼경정보통신과 공동으로 미생물을 흙에서 분리하고 배양하는 자동화 로봇 탐색시스템을 개발했다. 「Drug Discovery」의 앞 두자씩 따 「Dr. DI」로 명명된 이 시스템은 1분에 3백개(최대 3천∼5천)의 균주를 처리할 수 있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제품으로, 성능이 너무 뛰어나 이박사팀은 이 로봇이 먹을(처리할) 흙을 구하러 다니기 바쁠 지경이다. ◎심사평·심사위원/“세계시장 진출할수 있는 신기술” 이철훈 박사가 개발한 레지오넬라 천연 살균소독제 「AL072」는 효능이 뛰어나고 인체와 환경에 전혀 무해한 완벽한 특성을 보이는, 세계적으로 아무도 접근하지 않은 분야의 탁월한 업적이다. 또 천연 생물농약 후보물질인 「세파시딘 A」는 강력하면서도 환경친화적인 특성을 보여 스위스의 한 기업이 비슷한 종류의 농약을 개발해 놓고 이를 제쳐놓고 이박사에게 상품화를 제안할 정도로 뛰어난 것이다. 이들 신물질은 지금까지 황무지나 다름없었던 국내 신물질 연구에서 새로운 장을 열었고 앞으로 물질특허를 통해 세계로 진출할 수 있는 기술로 평가되어 이박사를 제5회 「이달의 과학기술자상」 수상자로 선정했다. ◇심사위원장:진정일 고려대 교수 ◇심사위원:장성도 이수화학 고문·강민호 한국통신 해외사업본부장·김진동 서울경제신문 주필·명효철 고등과학원 부원장·박원훈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장·배무 이화여대 교수·변광호 생명공학연구소장·손병기 경북대 교수·손재익 한국에너지기술연구소 선임부장·이대운 현대자동차 중앙연구소장·이이형 한양대 부총장·전의진 과기처 연구기획조정관·정명세 한국표준과학연구원장·채영복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사무총장

관련기사



허두영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