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오늘의 경제소사] 淸건륭제

‘중국은 풍족하다. 부족한 게 아무것도 없으니 교역도 필요없다.’ 국가 대 국가의 대등한 통상을 요청하는 영국왕 조지 3세의 서신에 대한 청나라 6대 황제 건륭제의 답이다. 건륭제의 말대로 교역은 불가능했다. 영국의 비교우위가 없었기 때문. 천하의 영국도 팔아먹을 상품이 없었다. 결국 영국왕의 특사로 중국에 왔던 매카트니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갔다. 1793년 10월의 일이다. 영국이 이렇다 할 항변도 못하고 물러난 후 불과 50년이 지나지 않아 처지는 완전히 뒤바뀌었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청은 영국과 굴욕적인 ‘난징조약’을 맺었다. 막강하던 청이 어쩌다 그런 지경을 맞았을까. 오만과 부패 탓이다. 자만이 무리가 아닐 정도로 건륭제는 치적을 쌓았다. 중국 역사상 가장 긴 재위기간(태상황제 포함 63년) 동안 10여 차례 대외 원정으로 강역을 넓히고 문화와 예술을 장려해 고증학을 꽃피웠다. 화려한 외양과 달리 병든 내부가 밝혀진 것은 1799년 1월7일, 건륭제 사망 직후. 건륭제의 사위이자 병권과 재정권을 쥐고 있던 화신의 부패에 청 조정은 경악했다. 20년간 국가 세수와 맞먹을 만큼 부정축재를 한 화신은 역사상 최악의 탐관오리로 기록되고 있다. 부패와 어우러진 자만 끝에 싹튼 사회 혼란을 제국주의는 놓치지 않았다. 값 비싼 도자기며 차 수입에 은(銀)이 끝없이 유출되는 상황에서도 청나라 시장에서 통할 만한 상품을 찾을 수 없었던 영국의 선택은 아편. 쇠락한 청은 아편과 선교사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 1912년 멸망에 이르렀다. 건륭제의 자만과 청의 부패는 남의 얘기일까. 부정축재로 구속됐던 전직 대통령, ‘차떼기’ 불법 대선자금의 주인공들은 여야를 가릴 것 없이 당당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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