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송현칼럼] 집단소송제와 공인회계사

서태식<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

연초부터 집단소송제 실시로 상장기업 모두가 떨고 있다. 공인회계사는 더 많이 떨고 있다. 기업의 걱정은 자기 회사 하나로 한정되지만 공인회계사는 많은 회사를 감사하다 보니 기업에 비해 몇배, 몇십배로 소송에 걸릴 가능성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회계정보의 신뢰성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시장경제를 가능하게 하는 생명수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을 돌아보면 분식회계라는 야릇한 표현이 사용되는 회계부정 사건이 한두 건이 아니었다. 많은 기업들이 부실회계를 했고 공인회계사가 이를 적발하지 못한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과거에 저지른 부실이 얼마나 많았으면 이를 다 청소하기에는 지난 일년으로 부족했고 앞으로 삼년은 더 시간을 줘야 청소를 마칠 수 있다고 하겠는가. 공인회계사로서는 정말 기가 차는 일이다. 요즘 터지고 있는 회계부정 사건을 보면 그 내용이 대부분 회사 최고위층에서 분식을 지시하고, 서로 견제해야 할 조직원들이 함께 공모해서 저지른 일들이다. 이러한 것은 유능한 감사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적발할 수 없는 것이다. 감독당국이 일이 불거진 후 이렇게 감사했더라면 적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았으니 부실감사라 단정하고 처벌하지만 그렇게 했더라도 적발될 수 없도록 조작하는 기법은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지난해 12월28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3부가 “회사 경영자나 종업원, 제3자 등에 의해 매출 등 관련서류가 위조됐을 경우 외부 감사인이 서류의 위조 여부까지 확인해야 할 의무는 없다. 회계감사를 더 충실히 했더라도 서류 위조를 발견해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것은 정말 시의적절하고 본질을 이해한 판단이다.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감사를 했더라면 잘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참 순진해 보인다. 모두가 공인회계사의 감사기법에 깔린 기본 원리를 모르고 하는 말이다. 그리고 고맙게도(?) 공인회계사를 과잉신뢰하고 하는 이야기다. 회계감사의 기법은 내부통제 시스템을 먼저 살피고 통제가 잘됐다고 판단되면 샘플링을 드문드문 하고 통제가 약하다고 판단되면 샘플링을 촘촘히 하도록 설계돼 있다. 그리고 통제가 아예 돼 있지 않은 경우는 감사 불능으로 처리한다. 요즘 터지고 있는 문제의 대부분이 ‘감사 불능’인 상황이었는데 이를 미처 모르고 감사를 했다가 곤란을 당하게 된 것들이다. 이런 사정을 모두 이해한다면 공인회계사의 능력을 과신해서는 안되는데도 공인회계사의 책임과 관련된 법들은 대부분 과잉신뢰에 바탕하고 있다. 골병들게 하는 법들이다.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한 가지만 들어보자. 현재의 제도를 보면 손해를 봤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회계사에게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않고도 쉽게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회계사는 자기의 잘못이 없음을 입증해야 비로소 손해배상책임을 면한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가 남소의 원인이 되고 있음은 불 보듯 뻔하다. 회계사의 입증부담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언뜻 ‘잘못이 없음을 증명하면 될 것 아니냐’고 남의 말처럼 쉽게 할 수 있을지 모르나 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소송이 제기되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한다. 경비가 문제다. 소송이 시작된 후에도 그 소송이 끝날 때까지 온통 뒤치다꺼리에 매달리느라 다른 일은 못한다. 큰 소송이 걸리면 회계사의 평판이 나빠져서 업무 확보도 안된다. 소송에 걸렸다 하면 잘잘못을 가리기 전에 당사자인 공인회계사는 초주검이 되고 마는 것이다. 만에 하나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고 소송에 이긴다 치자. 그런 경우에도 소송 중에 잃어버린 명예와 시간과 노력을 회복하는 일은 요원할 뿐이다. 그래서 손쉬운 합의 등을 택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집단소송제가 본격적으로 실시되고 법무시장이 외국인에게까지 개방되면 소송은 넘쳐날 것이고 제일 먼저 거덜 나는 자는 아마 공인회계사일 것이다. 이 문제의 중심에 입증책임이 자리잡고 있다. 공인회계사가 부실감사를 했고 이로 인해 손해를 봤다고 하는 원고의 주장(손해인과관계)에 대해 그러한 사실을 원고가 입증하지 않고 피고에게 ‘그렇지 않다’고 입증하도록 해 소송을 걸기 쉽게 해둔 것이 문제의 발단이란 뜻이다. 미국에서는 증권집단소송의 남소 경향이 나타나자 지난 95년 증권민사소송법(Private Securities Litigation Reform Act of 1995)을 마련해 ‘손해인과관계’의 입증책임을 원고에게 지우고 있다. 우리나라도 고의나 중과실로 부실감사를 한 회계사는 형벌로 엄격히 다스리되 공인회계사에게 민사소송으로 지나친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는 조속히 입증책임을 원고에게 지워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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