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기고/5월 27일] 식량자급, 다시 녹색혁명으로

지난 1978년 5월 쌀 자급을 기념하는 ‘녹색혁명성취탑’이 세워진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30년 전의 일이 됐다. 쌀 자급이 이뤄지기 전까지 우리 농가는 해마다 보릿고개 넘는 일을 걱정했고 미국의 잉여농산물로 부족분을 겨우 충당하며 살았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식량 풍요라는 기적 속에 살고 있다. 험난했던 과거를 잊고 사는 것은 아닐까. 1950~60년대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6년간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으며 인적ㆍ물적 자원을 철저히 수탈당했고 이어진 국토 분단, 3년간의 한국전쟁, 냉전구도 속 남북 대치 등 한반도의 특수한 사회ㆍ정치적 환경은 전국민을 빈곤층으로 전락시켰다. 이에 역사를 개척하려는 국가적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빈곤타파는 나라의 첫 번째 목표가 됐고 그 수단은 수출이었다. 천연자원이 빈약하고 공업기반이 갖춰지지 않았기에 노동력을 통한 제조업이 수출의 주축이 됐다. 산업기술의 부재로 기술집적제품의 생산은 어려웠고 수공업제품이 주류를 이뤘다. 당시 시골 가정마다 정성스럽게 보관해오던 여인들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든 가발이 효자수출품이었으니 그때의 정황을 짐작할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려운 문제에 당면했다. 대부분의 일손은 농촌에 있었기에 농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으면서 일손을 뽑아내는 게 매우 힘들었다. 농사인력을 줄이면 수확량이 감소해 곡식자급률을 더욱 악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우선 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경운기와 탈곡기를 대대적으로 보급했다. 농기계의 도입으로 농사에 투입되는 노동력이 절감됐고 잉여노동력이 창출될 수 있었다. 정부는 또 농산물 생산량을 높이는 비료의 원활한 공급에 중점을 뒀다. 하지만 그때 재배되던 벼 품종들은 당시 농사법으로 재배할 경우 비료 투입의 효과가 미미해 다수성 벼 품종과 새로운 재배기술의 도입이 절실히 필요했다. 주곡인 쌀 자급을 목표로 1960년대 후반 녹색혁명의 야심 찬 연구는 이런 배경에서 시작됐다. 때마침 필리핀에 있는 국제쌀연구소(IRRI)는 당시로서는 초다수성인 ‘기적의 벼’ IR8를 발표했다. IR8는 키가 작아 비료를 많이 줘도 쉽게 쓰러지지 않고 생산량도 매우 높은 품종이었다. IR8는 좋은 품종이었지만 열대지방 기후에 적응하도록 개발돼 우리가 그대로 이용할 수는 없었다. 농촌진흥청은 IRRI의 협조로 IR8를 우리 기후에 맞도록 개발하는 데 전력투구했다. 벼를 재배할 수 없는 겨울철에는 필리핀에서 종자를 증식하고 봄에 그것을 공수해 우리나라 논에서의 적응성을 분석, 개선해나갔다. 오랜 기간의 연구 끝에 훗날 통일벼라 불린 다수성 벼 품종 IR667을 만들었다. 1972년 우리나라 논에서 IR667 재배시험을 시작했고 해마다 재배면적을 늘려 1977년 쌀 자급에 대한 대망의 꿈을 실현했다. 짧은 기간 동안 엄청난 업적을 이룬 데 대해 세계농학계는 크게 놀랐다. 당시 농촌진흥청의 독특한 시스템 또한 세계를 놀라게 한 녹색혁명의 숨은 주역이었다. 전국 농민에게 통일벼를 배포해 심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농촌진흥청의 연구와 기술보급이 병행됐기 때문이다. 개발된 기술은 신속히 농가에 전달됐고 현장에서 발생한 문제는 즉각 연구자에게 알려져 보완됐다. 오늘날 우리는 풍요를 구가하고 있다. 그러나 1960~70년대를 거쳐 온 세대들은 안다. 배고픔, 그것은 인간에게 가장 큰 서러움이며 가장 무서운 위협이기도 하다. 최근 국제시장에서 곡물가격이 가파르게 오르며 국내 경제를 흔들고 있다. 언제 다시 요동칠지 모르는 세파 속에서 국민이 배고프지 않도록 하는 일은 어떤 정책보다 우선돼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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