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 '죽음의 상인'이 만든 노벨상 계절

이부섭 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장


지난 1888년 알프레드 노벨의 동생이 사망했다. 다음 날 신문을 펼쳐 든 노벨은 '죽음의 상인, 다이너마이트 왕, 알프레드 노벨 사망하다'라는 부고를 읽었다. 기자가 착각한 해프닝이었지만 그가 받은 충격은 상상 이상이었다.

노벨은 훗날 자신이 다르게 기억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여러 번 고쳐 쓴 끝에 1895년 11월27일 유언장을 완성했다. 전 재산을 바쳐 상을 만들겠다는 뜻을 담았다. 평화상은 당시 분쟁을 겪고 있던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화해하기를 바라는 의미에서 고국 스웨덴이 아닌 노르웨이에서 선정해 시상토록 했다. 그러나 정작 노벨이 1896년 12월10일 협심증으로 숨지자 스웨덴 국왕과 언론은 "스웨덴의 재산을 외국에 나눠주는 것은 비애국적인 처사"라고 비난했다. 당시 노벨의 유산은 3,122만크로나, 우리 돈으로 2,500억원이 넘었다.


우여곡절 끝에 노벨의 사망 5주기인 1901년 12월10일 스웨덴 왕립 음악 아카데미에서 첫 노벨상 시상식이 열렸다. 제1회 수상의 영광은 엑스선을 발견한 빌헬름 뢴트겐과 적십자의 아버지 앙리 뒤낭 등에게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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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114년이 지난 오늘까지 노벨상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상 중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상금을 더 많이 주는 상은 얼마든지 있지만 어떤 상도 노벨상의 영광에는 범접하지 못한다. '죽음의 상인' 대신 '평화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싶었던 노벨이 흡족해할 만하다.

1901년 이후 지난해까지 876명이 노벨상 수상의 영광을 안았다. 노벨상에 얽힌 얘기와 에피소드 역시 셀 수 없이 많다. 그중 하나가 노벨상 명문가. 여성 과학자의 대명사인 마리 퀴리는 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을 받았다. 남편 피에르 퀴리는 1903년 물리학상 공동수상자였다. 딸 이렌과 큰 사위 프레데리크 졸리오퀴리는 1935년 화학상을 받았고 둘째 사위 헨리 리처드슨 라부이스 주니어는 1965년 유니세프 대표로 평화상을 수상했다. 한 집안에서 5명이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이다.

반면 노벨상 역사에서 자의로 수상을 거부한 사람은 장폴 사르트르와 1973년 평화상 수상자인 레 둑 토 북베트남 총리 단 둘뿐이다. 1964년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사르트르는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독자들을 노벨상이라는 바람직하지 않은 압력에 노출시키고 싶지 않다. 또 수상자의 어깨에 상금이라는 무거운 짐을 얹어주고 있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러나 필생의 라이벌로 여겼던 알베르 카뮈가 1957년에 먼저 노벨상을 수상하면서 자존심에 상처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정설이다. 사르트르는 후일 곤궁해지자 "상금은 받을 수 있다"고 입장을 바꿔 비웃음을 샀다.

올해도 6일 생리의학상을 시작으로 노벨과학상 수상자가 차례차례 발표됐다. 전 국민의 염원에도 불구하고 올해도 한국인 노벨과학상 수상자는 끝내 호명되지 않았다. 그러나 최근 발표된 톰슨 로이터의 노벨상 수상자 예측에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유룡 기초과학연구원 단장과 찰스 리 서울대 석좌교수가 이름을 올렸다. 드디어 우리도 노벨과학상에 점차 가까워지고 있다는 희망의 증거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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