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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과 큰 맘먹고 영화 보다가… 황당
[이슈 인사이드] 엉터리 판치는 영화번역하이엘프가 높은 요정? 질낮은 자막에 작품 왜곡 다반사
김연하기자 yeona@sed.co.kr
서울 시내 한 영화관에서 관객들이 영화를 보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최근 부실한 영화 번역 때문에 작품의 의도가 왜곡되는 사례가 있따르면서 관람객들의 문제제기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경제DB
시대 상황과 동떨어진 의역 농담·유행어 남발에 쓴웃음"영상만 좋으면 그만" 인식 만연 번역비 절감위해 대학생 고용 수입사 일방적 일정 조정도 문제번역물 제3자 감수 절차 도입 번역가 처우개선, 전문성 높여야
직장인 김모씨는 지난해 말 여자친구와 모처럼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극장을 찾았다. 영화광인 여자친구와 논의 끝에 '반지의 제왕' 시리즈의 프리퀼(전작보다 시간상으로 앞선 이야기를 보여주는 작품)인 '호빗: 뜻밖의 여정'을 보기로 했다. 영화관을 들어갈 때만 하더라도 좋은 데이트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당시 상당한 인기를 끌고 있었던 영화인 만큼 여자친구와 공감대를 넓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씨의 기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영화 내용과 맞지 않는 엉뚱한 자막들이 튀어 나오면서 도저히 영화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김씨는 "귀족엘프를 뜻하는 '하이엘프'가 '높은 요정'으로 나오고 종족 이름인 드워프가 난쟁이로 번역돼 순간적으로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영화를 보는 줄 알았다"며 "피터 잭슨 사단이 정성들여 구성한 세계관이 잘못 전달되는 바람에 그날 데이트를 망쳤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호빗:뜻밖의 여정은 우리나라 영화 번역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 주는 사례다. 상영되는 영화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번역 수준이 이를 따라주지 못해 원래의 작품 의도를 왜곡시키는 경우가 다반사다. 지난해 한 해 국내에서 영화를 관람한 관객 수가 1억9,489만명에 달하고 극장 매출도 1조4,551억원에 이를 정도로 영화는 이제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취미생활이자 문화생활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영화에 등장하는 자막은 한심한 수준인 경우가 많아 영화산업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호빗:뜻밖의 여정 뿐만 아니라 영화의 이해를 방해하는 사례는 부지기수다. 세계 최고 권위 독립영화제인 제28회 선댄스영화제에서 장편 영화상인 '앨프리드 피 슬론(Alfred P.Sloan)'상을 수상한 '로봇 앤 프랭크'에 등장하는 로봇은 텔레비전 아나운서처럼 표준어에 가까운 말을 구사하지만 실제 자막에는 '~했음'으로 마무리하는 이른바 음슴체를 사용해 영화 분위기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That cereal is full of unhealthy ingredients'를 '그건 조미료 천국임'으로 나타내는가 하면 'I'm glad to see you so enthusiastic'을 '팔팔해 보이심'으로 전혀 엉뚱하게 번역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해외 유학을 갔다 와 영어를 웬만큼 알아 듣는 직장인 박모씨는 "영어 대사를 알아들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잘못된 자막이 더 거슬려 영화에 집중을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을 그린 '마리 앙투아네트'는 시대 상황과 맞지 않는 단어가 관객들의 눈 밖에 났다. 영화의 배경이 18세기임에도 등장인물이 '므흣ㆍ대략 난감ㆍ코디가 안티' 등 21세기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단어를 자막으로 등장시켜 영화를 코미디화 해 버렸다. 이 때문에 인터넷 게시판에서는 지나친 의역을 질타하는 관객들의 불만이 쏟아지기도 했다. '트랜스포머:패자의 역습'도 Fallen'이 영화 속 등장인물의 이름이지만 '패자'로 번역돼 영화 마니아들 사이에 논란이 되기도 했다.
잘못된 단어 번역도 부지기수다. 소련의 핵잠수함 K-19호에서 일어난 원자로 사고를 내용으로 하는 'K-19: 위도우메이커'에서는 군대용어로 구축함을 뜻하는 'destroyer'를 '파괴자'로, 전 세계에서 흥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종대'를 뜻하는 'column'을 '횡대'로 번역하는 등의 오류를 범했다. 정통첩보영화로 분류되는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는 일부 대사의 번역을 생략해 관객의 이해도를 떨어뜨렸다는 논란을 일으켰다.
이 같은 현상이 벌어지는 것은 영화 번역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 일차적인 원인이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곽중철 한국외대 통번역대학원 한영과 교수는 "수입사들은 영상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해 번역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다"며 "번역비를 아끼기 위해 비전문가인 대학생을 고용하기도 하는데 번역에 대한 인식부터 바뀌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봉석 영화평론가는 "번역 후 원문대조를 해야 하는데 말이 통하면 넘어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면서 "비용이 들더라도 번역 결과물을 제 3자가 감수하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의역의 경우 "번역가 개인의 신념이나 스타일을 존중할 필요가 있지만 농담이나 유행어를 지나치게 사용하면 영화의 본래 의도를 왜곡할 우려가 있다"고 강조했다.
번역에 대한 그릇된 인식은 열악한 번역 환경으로 나타난다. 일부 영화사에서는 미개봉 영화가 유출될까봐 번역자에게도 테이프를 제공하지 않고 대사만 나오는 스크립트만 준다. 이 때문에 번역가들은 영화 시사실에서 영화를 보면서 녹음을 한 뒤 혼자서 노트북을 들고 작업을 하는 경우가 부지기 수다.
수입사의 일방적인 일정 조정도 잘못된 자막을 낳는 한 요인으로 꼽힌다. 보통 5~7일의 번역기간이 주어지는 데 이마저도 단축되는 경우가 많다. 일부에서는 짧은 기간에 스크립트도 없이 번역을 하는 경우도 있어서 오역의 원인이 되고 있다. 한 번역가는 "해외일정에 맞춰 동시개봉을 하는 블록버스터는 번역 기간이 짧다 보니 영상을 한 번만 보고 번역하기도 한다"며 "번역가도 오역에 대해 책임이 있지만 영상을 충분히 보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다"고 토로했다.
일부에서는 불법 다운로드를 원인으로 지적하기도 한다. 한 수입사 관계자는 "국내 개봉도 하기 전에 온라인에서 불법영화파일이 돌아다니기 때문에 최대한 개봉을 앞당길 수밖에 없다"며 "이 과정에서 번역가를 재촉하는 일이 불가피하게 발생한다"고 해명했다. 그는 "국내개봉을 위해서는 심의를 받아야 하는데 심의스케줄에 따라 소요기간이 천차만별이라 심의스케줄을 맞추기 위해서는 번역일정을 앞당길 수 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번역가들의 처우가 좋지 않다 보니 번역가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떨어진다는 점도 문제다. 번역의 경우 해당 분야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이 있어야 하는데도 전문용어 등을 공부하지 않다 보니 영어 대사를 기계적으로 우리말로 옮기는데 급급하면서 엉뚱한 번역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한 영상번역가는 "해외 영화사는 번역가가 스트리밍 방식으로 영상을 집에서도 볼 수 있도록 인증권한을 준다"며 "우리나라도 이 같은 시스템을 구축하면 충분한 영상을 확보하게 돼 오역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