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의 특검 수용은 사실 자신에겐 ‘정치적 항복 선언’이다. 누구보다 원칙을 소중히 여겨왔지만 현실을 뒤로 한 채 ‘통하지 않는 원칙’을 내세웠다가 돌아올 정치적 부메랑을 감내하기 힘들었다. 거부권을 행사하더라도 국회가 재의를 통해 특검을 강행할 것이 뻔한데다 임기 말 상황에서 정치권으로부터 ‘왕따’를 당하는 이른바 ‘식물 대통령’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작용했다.
‘현실에 발목 잡힌 원칙.’ 이런 상황론은 27일 기자회견 자리에 선 노 대통령의 발언 곳곳에서 배어났다. 노 대통령은 우선 “대통령은 사인(私人)이 아니다. 정치인이다. 결과를 고려하지 않은 정치인은 없고 정치인이 지사(志士)적 기개를 갖고 판단하는 것과 같을 수 없다”고 수용의 배경을 설명했다. “재의를 요구하면 정치적 논란을 불러오고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럴 만한 정치적 이익이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노 대통령이 당선축하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고 이용철 전 청와대 법무비서관의 폭로까지 나온 상황에서 특검법을 거부할 경우 ‘삼성 비호설’과 축하금 수사를 피하기 위한 ‘면피용 거부권’이라는 여론의 비판만 확산될 수 있다는 계산도 작용했다.
노 대통령은 그러면서도 특검법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거부감을 강하게 드러냈다. 노 대통령은 “이 특검법이 법리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굉장히 많은 문제를 갖고 있다는 생각을 말하려 자리에 섰다”고 말문을 열었다. 노 대통령은 이번 특검법안에 대해 “국회의원들의 횡포이고 직권 남용이다. 특검법은 국회가 필요에 따라 언제든 끄집어낼 수 있는 정치적 남용의 도구가 돼선 안된다”고 지적했다.
이는 자신이 ‘애착’을 가져온 ‘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의 필요성에 대한 논리로 이어졌다. 노 대통령은 “다리가 있으면 다리로 다니면 되는데 굳이 나룻배를 띄워야 하냐”고 지적했다. 각 당이 지난 대선에서 공수처법을 공약으로 내세워놓았고 국민 다수도 필요성을 인식하는데 ‘대통령 흔들기’를 위해 마구잡이로 특검의 칼을 빼들고 있다는 얘기다.
이런 상황론들과 별개로 노 대통령으로서는 특검법 수용으로 스스로 적지않은 후폭풍에 휩싸이게 됐다. 무엇보다 특검법은 노 대통령의 향후 행보, 특히 퇴임 후에 치명적인 독약으로 작용할 수 있다. 물론 이날 회견에서 노 대통령은 이런 부분에 대해 다시 한번 자신감을 내비쳤다. 노 대통령은 당선축하금을 받지 않았다고 재차 확언한 뒤 축하금을 운운한 것을 ‘대통령 흔들기’라고 규정하고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 등을 향해서는 “고소하고 싶었다”는 말까지 꺼냈다. ‘수사에 어떻게 응할 것이냐’는 질문에는 “대통령을 겨냥한 수사가 많이 있었다. 법대로 양심껏 대응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상황은 어떻게 흐를지 모른다. 노 대통령이 자신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측근들까지 자유로울지는 미지수다. 노 대통령은 “청와대 참모들은 옛날부터 춥고 배고프게 살던 사람이어서 (관리가 될) 인맥이 없다. 거래해가면서 따뜻하고 편안하게 비서한 사람은 많지 않다고 본다”며 참모들을 두둔했지만 가혹한 수사의 과정에서 어떤 결과가 튀어나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더불어 그 결과는 차기 총선에까지 엄청난 영향을 끼질 것이다. 임기 3개월을 남긴 노 대통령은 지금 새로운 정치적 갈림길에 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