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 의류회사를 경영하던 A씨는 지난 97년 IMF 이후 돈을 받지 못한 채권자들이 자신 소유의 부동산을 강제 집행하려고 하자 외삼촌 B씨와 명의신탁 약정을 맺고 99년 부동산소유권 이전등기를 마쳤다. 형편이 나아져 강제집행의 위험이 없어지자 A씨는 2005년 외삼촌으로부터 소유권을 이전해달라는 소송을 냈다.
그동안 대법원 판례에는 명의신탁된 부동산의 경우 명의신탁자가 수탁자를 상대로 이전등기를 청구할 수 있다고 규정돼왔기 때문에 A씨의 승소는 충분히 예견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1심 재판에서 A씨는 패소했다. 이종광 서울서부지법 민사2단독 판사는 A씨가 B씨를 상대로 낸 소유권 이전등기 청구소송에서 “불법적 목적의 소유권 이전에 대해 명의회복을 요구할 수 없다”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는 채무상환 회피나 탈세 등의 목적으로 명의신탁제도를 악용했다면 나중에 소유권 이전을 요구할 수 없다는 판결로 기존 대법원 판례와 배치돼 사회적 파장이 일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이 판사는 대법원의 잘못된 관행을 강하게 비판해 법원 안팎에서도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이 판사는 A4용지 48쪽 분량의 긴 판결문에서 명의신탁의 문제점과 이 제도의 폐해를 없애려고 도입한 부동산실명제 등 두 제도에 대한 대법원 판례를 꼼꼼히 따졌다.
그는 또 “정부가 법원에 의해 유지된 명의신탁제도를 폐지하기 위해 도입한 부동산실명제가 시행 10년이 넘어가지만 대법원은 명의신탁의 유효성에만 집착해 신탁자의 재산을 보호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 판사는 판결문 말미에서 “수천억원의 형사추징금을 받았던 전직 대통령이 재산이 29만원밖에 없어 추징금을 납부하지 못한다고 하면서 그 자식들은 수억원대의 부동산을 갖고 기업을 경영하는 것이 우리의 사법 현실”이라고 질타했다.
그는 “타인의 이름을 빌려 투기를 통해 부를 축적하고 정당한 세금을 타인의 명의를 빌려 포탈하고 그 돈으로 투기를 하다가 빚을 지면 재산을 타인의 명의로 해둠으로써 채권자가 아무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은 끝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