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TO의 결정은 우리에게도 결코 강 건너 불이 아니다. WTO 회원국 가운데 의무수입물량을 늘려주는 대가로 쌀의 관세화를 미뤄온 나라가 필리핀과 한국뿐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두 차례에 걸쳐 10년씩 총 20년간 쌀 시장 개방을 유예해왔다. WTO도 더 이상의 유예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필리핀처럼 의무수입물량을 2.3배 늘리고 다른 당근을 제시한다 해도 관세화를 더 이상 미루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설령 WTO가 우리 정부의 요구를 수용한다 해도 문제다. 지난해 쌀 생산량의 22%나 되는 94만톤이 의무수입물량으로 쏟아져 들어오면 심각한 공급과잉에 처할 수밖에 없다. 최근 10여년새 1인당 소비량이 25%나 줄어 국내산 쌀조차 남아도는 판이다. 게다가 남는 쌀 보관비만도 해마다 수백억원이다.
차라리 쌀 시장을 개방하되 관세율을 높게 매기면 의무수입물량 외에 수입 쌀이 더 들어올 가능성은 낮아진다. 관세율은 1986~1988년 국내외 가격차를 기준으로 책정하는데 300~500%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이 정도의 관세를 물리면 수입 쌀이 가격경쟁력을 갖기 힘들다. 우리보다 먼저 관세화로 돌아선 일본·대만도 쌀 수입이 거의 늘지 않았다. 정부는 6월까지 관세화 여부를, 9월까지 관세율을 산정해 WTO에 전달해야 한다. 정부가 앞장서 국민적 공감대 조성과 농민 설득에 나설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