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유종근 당시 DJ경제고문

"DJ정책 불신에 美와 외채협상 제일 힘들어"<br>YS측 요청에 DJ 당선자 신분으로 전면 나서<br>反시장적 선거공약 많아 한때 의견충돌 심각<br>외채 만기연장 합의후 외평채 발행 관철 뿌듯


유종근 전 전북지사가 김대중(오른쪽 두번째)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한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미국 대학교수 출신인 유 전 지사는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외채협상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했다./서울경제DB

[외환위기를 겪은 사람들] 유종근 DJ경제고문 옥중 인터뷰 "DJ정책 불신에 美와 외채협상 제일 힘들어"YS측 요청에 DJ 당선자 신분으로 전면 나서反시장적 선거공약 많아 한때 의견충돌 심각외채 만기연장 합의후 외평채 발행 관철 뿌듯 이종배기자 ljb@sed.co.kr 이재철기자 humming@sed.co.kr 유종근 전 전북지사가 김대중(오른쪽 두번째)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방한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미국 대학교수 출신인 유 전 지사는 대통령 경제고문으로 외채협상을 막후에서 지원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했다./서울경제DB 관련기사 • 김용환 "DJ '換亂극복' 선언 왜 서둘렀는지…" • 김중수 "잠재성장률 저하 가볍게 봐선 안돼" • 최종욱 "제역할 못한 정부·은행·기업 '합작품'" • 유종근 "DJ불신에 美와 외채협상 제일 힘들어" • 이연수 "정부 '하이닉스 무조건 팔아라' 독려" • 정덕구 "대선 휘말려 신종 경제위기 올까 걱정" • 위성복 "기업 사정 모른채 구조조정 밀어붙여" • 손병두 "대우그룹 몰락, 정부도 일부 책임있다" • 김대송 "증권사 무분별 해외진출 리스크 크다" • 이용득 "관치금융이 환란 부른 결정적 요인" • 강봉균 "대우, 구조조정 서둘렀으면 해체 안돼" “역시나 미국과의 (외채)협상이 제일 어려웠습니다. 다른 나라는 미국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왔습니다. (환란 위기에 빠진 한국에 대해)미국이 가장 궁금해한 것은 새(DJ) 정부가 어떤 경제정책을 펼칠 것인지, 경제는 살릴 수 있을 지 여부였습니다”. 97년 한국 경제가 환란이라는 암초에 걸려 최대의 위기에 직면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의 경제고문으로 활동하며 외채협상을 막후 주도했던 유종근(63ㆍ사진) 전 전북도지사.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그는 우리 경제가 위기의 긴 터널을 지나자마자, 60년 인생 역정의 최대 위기를 맞고 현재 서울의 한 교도소에서 기나긴 동면(冬眠)을 나고 있었다. IMF 조기 졸업 이후 한때 ‘경제대통령’을 꿈꾸며 차기 유력 대권주자로 급부상하기도 했던 그는 수인번호 ‘120X’번이 새겨진 푸른색 수의복을 입고 면회실에 입장했다. 예전보다 다소 해쓱해졌지만 여전히 얼굴에는 건강함과 반듯함이 묻어 나왔다. 그는 당시를 회고하면서 정치인들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표’에 눈이 어두워 기업구조조정 지연이나 금융기관의 부실화를 촉발함에 따라 위기를 겪게 됐다며 정치권 책임론을 제기했다. DJ가 당선자 신분이었지만 전면에 나서게 된 데 대해 그는 “외국 자본이 속속 빠져나가면서 당시 40억달러 정도였던 외환보유고로 버틸 수 있는 기간은 2~3일에 불과했다. 다음해 2월 DJ 취임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나라가 망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인터뷰는 25분이라는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이뤄졌기에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형기가 2년 정도 남았는데 어떻게 지내고 있나. ▦만기출소까지는 아직 멀었다. 성경 공부도 하고 틈틈이 책도 쓰고 있다.(이 말을 하면서 그는 마음을 다스리려는 듯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는 야당은 물론 여당에서도 잊혀진 인물이 됐다. 지난해 7월 전북 지역의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각계각층 3만여명이 서명을 받아 탄원서를 제출했으나 광복절 특사에서 제외됐다. 그는 IMF 조기졸업의 일등 공신으로 98년부터 2002년까지 전북지사를 지내며 한 때 ‘경제 대통령’까지 꿈꾸기도 했지만, 비위사건으로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됐고, 결국 영어의 몸이 됐다) - 시간이 없으니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겠다. 지난 97년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당선이후 살펴본 우리 경제 상황은 어떠했나. ▦다음해 2월 25일 정식취임 때까지 (인수ㆍ인계를) 기다릴 형편이 아니었다. 97년 12월3일 IMF와 차관제공 양해각서를 체결했는데도 외국자본은 썰물처럼 계속 빠져나갔다. 처음에는 DJ는 대통령이 아니라며 전면에 나서길 주저했다. 하지만 내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는데 YS는 손 놓고 있으니 지금 나서야 한다”고 요청했다. -DJ가 YS에 먼저 인수인계를 제안한 것인가. ▦YS가 먼저 제안했던 것 같다. 이건 비사(秘史) 중 비사인데, 당시 이각범 정책기획수석비서관이 “YS가 DJ쪽 사람을 경제부총리로 임명해서 양쪽이 일을 같이 끌어 나가면 어떻겠는가”라고 물어왔다. 나는 “두 분이 결정해서 협의할 사안”이라고만 답했다. -IMF양해각서 체결 이후 DJ가 ‘IMF 재협상론’을 들고 나왔다. ▦12월3일 양해각서 체결 때 (IMF측에서) ‘임기가 얼마남지 않은 YS와 합의하는 것으로 안 된다’고 해서 당시 대선 후보 3명의 동의를 모두 받았다. 이회창 후보와 이인제 후보는 조건없이 사인을 했는데 DJ는 실업자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내용의 단서를 달았다. IMF는 단지 ‘정치적’ 제스처로만 생각하고 받아줬는데 국내 언론이 ‘역시 DJ’라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이 때문에 과욕을 낸 DJ가 재협상론을 들고 나왔고, 큰 파장이 일었다. -DJ가 미국 투자가인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 사우디 왕자의 투자 유치를 끌어냈는데. ▦(재협상론으로 촉발된) 시장의 우려를 줄여야 야겠다며 최규선씨가 나서서 (투자가)이뤄진 것이었다. 최씨가 조지 소로스, 알 왈리드에게 편지를 쓰고 회담도 주선했다. (후일 ‘최규선 게이트’로 큰 파문을 일으킨 최씨는 당시 대선 과정에서 자신의 미국 내 인맥을 과시하며 DJ의 국제담당특보로 활동했다. 특히 조지 소로스와 알 왈리드 왕자의 방한을 주선하며 외자유치에 나선 김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DJ는 대선을 6일 앞둔 12월 12일 국제화상회의를 통해 조지 소로스에게 한국 투자에 앞장서달라고 호소할 수 있었다) -DJ와의 의견충돌은 없었나. ▦(대선 전 12월 12일 조지 소로스와의)국제화상회의를 마친 DJ가 내게 차에 타라고 하더라. 차 안으로 끌고 가서 내게 선거공약을 보여주더라. 근데 시장원칙과 어긋나는 게 너무 많았다. “쇼에서 방금 IMF 프로그램을 100% 지지한다고 말해놓고 이렇게 만들면 어떻게 합니까. 외국자본을 규제하고 국내기업은 삼성도 위태위태한 상황인데 외국자본이 아니고는 살릴 수 없습니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DJ는 “외국자본에 (우리 기업이)먹히면 안 된다”고 하더라…18일 밤 당선이 확정되고 당선자 성명을 봤는데 (반시장 논리가 가득해서) 역시나 하고 생각했다. DJ에게 “기자회견을 하면 틀림없이 IMF에 대해 물을 테니 조심하라”고 당부했는데…그 양반은 논리적으로 납득이 안 되면 안 받아들이더라. 오히려 내게 “노동자들을 길거리 내보내면 어떻게 되느냐. 당신은 대학강단에만 서 있었지 않았냐”며…결국 (기자회견에서 DJ가) “마음대로 정리해고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바람에 시장에 또 충격을 줬다.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나는 바로 전주로 내려갔는데 일요일(22일)에 다시 (DJ로부터)전화가 왔다. 데이비드 립튼 당시 미 재무차관이 서울에 온다고 하니 빨리 와달라고. 월요일 10시에 당사에서 만난다고 해서 (이날)일산 자택에서 DJ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며 이렇게 강조했다. “미국이 얼마나 당황했으면 립튼이 왔겠습니까. (미국 입장에서 한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면 다시 살려봐야 미국 국민, 납세자들 세금을 낭비하는 건데, 마지막으로 확인해보고 IMF 차관을 지원해줘도 될지 말지 결정하는 마지막 테스트입니다. 이거 실패하면 안 됩니다.” -당시 고금리 등 IMF의 정책이 가혹했다는 지적이 있다. ▦단기적으로는 어쩔 수 없었다. 달러 매도를 막으려면 금리인상이 불가피했다. 저금리는 현실적 불가능했다. 금융기관들이 전부 부실화해서 금융 시장이 경색됐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싼 이자로 돈을 줄 수 있었겠나. -외채협상을 위해 많은 국가를 방문했는데. ▦미국, 일본, 독일, 프랑스, 영국 등 5개 국가였다. 역시나 협상이 제일 어려운 국가는 미국이더라. 다른 나라는 미국이 하자는 대로 다 따라왔다. 이자를 얼마로 할거냐는 정덕구(당시 재경부 제2차관보)가 다 했다. 그러나 미국이 원하는 건 그런 디테일이 아니라 과연 새 정부가 어떤 경제정책을 할 것인지, 경제를 살릴 수 있는지였다. 경제만 살릴 수 있으면 (미국이)그 까짓 거 만기연장 해주는 건 알아서 하는 거였다. -외평채 발행 상황은 어땠나. ▦외채 만기연장 협상 끝나는 과정에서 루빈과 줄다리기 한 게 “빨리 외평채를 발행하라”는 것(미측의 요구)이었다. 하지만 우리 계획은 협상을 마치고 발행한다는 것이었다. 외채협상이 어느 정도 진전돼 루빈을 만나러 김용환씨와 나를 포함해 (한국측)4명이 미국으로 가 “지금 발행하면 시장에서 한국에 대한 신뢰가 없기 때문에 발행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근데 루빈은 그래프까지 그려가며 30분간 “지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의견일치가 안 되고 평행성만 그리다 끝났는데 내가 (한국에 오기 전)미국에서 수 십년간 살지 않았냐. 순간적으로 판단할 때 루빈이 ‘깽판’을 치면 (외채 만기연장이)안 되는 거였지만 ‘어디까지는 버틸 수 있겠구나’ 하는 걸 직감으로 알겠더라. 그래서 계속 “(지금)발행하면 안 된다”고 밀어 부쳤다. 지금 생각해도 (발행 연기한 거) 참 잘했다. 만기연장 합의하고 난 다음에 발행하니까 얼마나 그때 호응 좋았나. 프리미엄(가산금리)도 굉장히 낮게 이뤄지고. - 외환위기 이듬해부터 기업간 ‘빅딜’(대규모 사업 맞교환)을 추진했는데. ▦개인적으로는 빅딜에 대해 강력히 반대했다. 경제원칙에도 맞지 않고 법치원칙에도 안 맞다고 DJ에게 계속 말했다. 근데 이 양반은 “왜 다른 사람들은 다 괜찮다고 하는데 당신만 왜 그러느냐”고 했다. 약력 ▦1944년 전북 정읍 ▦이리 남성고ㆍ고려대 경제학과 ▦뉴욕주립대학교빙엄턴교대학원 경제학 박사 ▦미국 럿거스대학교 조교수(73~78) ▦재미한국인권문제연구소장(85~87) ▦평민당 김대중대통령후보 정책 기획담당특보(87) ▦제29~30대 전라북도 도지사(95~2002) ▦김대중대통령 경제고문(98.1~99.6월) 입력시간 : 2007/01/10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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