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3년 7월28일, 일본이 지조개정(地組改正) 포고령을 내렸다. 지조란 농업에 대한 세금. 유신정부는 전국적으로 농지와 소출을 조사해 과세기준을 수확량에서 지가로 변경하며 지가의 3%를 세금으로 내도록 했다. 지조를 쌀 같은 현물에서 화폐로 납부하도록 한 것도 특징이다. 일본의 세제개혁은 국왕 중심의 중앙집권화 작업 이후 경제적 후속조치. 막부정권이 각 지방 번주에게 하사한 봉토를 국왕에게 반환하고 국왕이 이를 다시 번주들에게 내려준 판적봉환(版籍奉還ㆍ1869년)과 274개의 번을 폐지하고 3부 302현을 설치한 폐번치현(廢藩置縣ㆍ1871년)에 이은 개혁정책 가운데 하나였다. 지조개정이 근대적 조세인가, 봉건제의 흔적이 남은 제도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났다. 작황과 관계없이 전국 동일 기준의 농지세가 화폐로 걷혀 재정의 기초를 다졌다는 점이다. 통계가 시작된 1875년 국세의 85.1%가 지조로 걷혔다. 지주들도 쌀값 급등에 따른 차익을 고스란히 챙겼다. 반면 쌀값 폭락의 손실과 고리의 현물소작료를 부담하게 된 자작농과 소작농은 갈수록 궁핍해져 일부 지방에서는 고율의 세금에 반대하는 폭동이 일어났다. 군대까지 출동했던 조세저항은 세율을 2.5%로 낮추고서야 겨우 가라앉았다. 일본은 개항 초기 각국과 맺었던 불평등조약 시정에 적극 나서 관세주권을 되찾은 뒤 지조세율 인하로 인한 세수감수를 메웠다. 몰락한 농민들은 도시로 쏟아져 나왔다. 마침 강력한 제조업 육성책인 식산흥업(植産興業)정책 속에 새롭게 들어서는 공장들은 몰락한 농민 출신의 거대한 산업예비군으로 인력을 싼 값에 제공받을 수 있었다. 지조개정이 일본의 임금을 저임금 구조로 고착시킨 셈이다. 근대 일본의 급성장에는 농민들의 피땀이 어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