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주' '황제주' '한국증시의 희망' 시가총액 90조원, 유가증권시장 비중 12.45%. 모두 삼성전자를 일컫는 말들이다. 한동안 한국증시와 삼성전자는 동의어에 다름 아니었다. 모든 시장 참가자가 삼성전자 주가를 바라보며 박수와 환호성을 보냈던 게 오래전 일이 아니다. 그러나 삼성전자에게 지난 2년은 '굴욕의 시기'였다. 코스피지수가 1,400포인트에서 2,000포인트까지 숨가쁘게 내달릴 동안 삼성전자 주가는 65만9,000원(2006년 1월2일 종가기준)에서 55만6,000원(2007년 12월28일 //)으로 15% 이상 하락했다. 기관들은 연일 삼성전자 주식 바겐세일에 나섰고, 삼성전자 주식을 많이 담는 펀드매니저는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삼성전자 앞에 붙던 화려한 수식어는 사라지고 언제부턴가 '못난이주'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그랬던 삼성전자가 올 들어 화려한 변신을 시작했다. 코스피지수가 300포인트 넘게 떨어지는 와중에도 삼성전자 주가는 연초대비 12% 넘게 올랐다. 외국인과 기관 모두 앞 다투어 삼성전자 쓸어담기에 나섰다. 삼성그룹사는 지난 수 개월간 특검이다, 기름 유출이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정작 시장에서는 박수를 받으며 다시금 화제의 중심에 올랐다. 지난해 내내 제자리만 맴돌던 삼성전자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황제'가 귀환한 것일까. 창립 70주년, 고희(古稀)연도 못한 삼성 계열사의 땅에 떨어진 자존심은 시장에서 회복할 수 있을까. '대장주'에서 '못난이주'로 추락했던, 그리고 이제 다시 '황제주'로서의 위용 되찾기에 나선 삼성전자 주가의 방향성을 탐색해 본다. 시련 딛고 사업구조 더 단단…주가 올들어 12%이상 상승
수급 안정도 매력적 외국인·기관 "이젠 사자"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못해…일부선 "투자 늘리기엔…" 2007년 8월29일 오후 2시. 전국의 증권사 객장이 술렁였다. 무서운 기세로 질주하던 포스코 주가가 삼성전자를 따라잡는 순간이었다. 장 마감 후 뒤집혔던 주가는 다시 제자리를 찾았지만 투자자들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됐다. 닷새 뒤인 9월3일, 드디어 종가 기준으로 포스코가 삼성전자 주가를 뒤집었다. 59만2,000원 대 59만1,000원. 주가 차이는 1,000원에 불과했지만 여의도 호사가들은 “쇳물이 반도체를 녹였다”며 흥분에 휩싸였다. 9월5일. 삼성전자의 시가총액 비중이 8년만에 8%대로 떨어졌다. 9월20일. 우량주 위주로 구성된 코스피200에서 삼성전자 비중이 10% 이하로 추락했다. 10월9일. 삼성전자 시총 비중이 7%대로 줄었다. 10월30일. 주우식 삼성전자 IR팀장(부사장)이 “박현주 미래에셋 회장을 만나겠다”고 나섰다. 그 날, 미래에셋증권 창구에서 삼성전자 매매는 ‘팔자’로 돌아섰다. 일주일 뒤, 박 회장은 주 부사장의 면담을 거부했다. 하지만 삼성전자는 올해들어 부활의 날개를 펴고 있다. 연초대비 주가 상승률은 12.87%(3월25일 기준). 7%대까지 떨어졌던 시장대비 시총 비중은 어느새 12%대를 넘었다. 그 사이 포스코는 올 들어서만 14% 넘게 주가가 빠지며 두 종목 사이의 주가격차는 10만원 넘게 벌어졌다. 지난해 줄기차게 삼성전자를 내다팔던 기관들은 이미 지난해 말부터 슬금슬금 삼성전자를 바구니에 담기 시작했다. 골드만삭스, 씨티그룹 등 외국계 증권사들도 앞다투어 삼성전자 목표가 올리기 경쟁에 나서고 있다. ◇사업구조 더욱 단단해졌다= 삼성전자의 최근 단기 반등의 직접적 원인은 무엇보다도 IT부문 경기 회복을 꼽을 수 있다. 지난 수 년간 바닥을 쳤던 전세계 IT경기가 호전될 기미를 보이고 있고 이에 따른 D램 가격 반등과 환율 상승에 따른 원가경쟁력까지 더해져서 올 1ㆍ4분기 실적 상승을 예고하고 있다. 박영주 우리투자증권 연구원은 “올해 중 예상되는 반도체 산업의 회복과 LCD 부문의 견조한 실적, 휴대폰 부문 시장 점유율 확대 등을 감안하면 2004년 이후 4년만에 순이익 10조원 이상 달성이 가능할 것”이라며 “주가 역시 지난 2년간 지속된 박스권을 탈피하고 신고가를 경신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당초 블룸버그는 삼성전자의 올 1ㆍ4분기 영업이익을 1조4,500억원 수준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일부 증권사들은 이 같은 영업익 예측이 과소평가됐다며 1조6,000억~1조7,500억원 수준까지 달성이 가능할 걸로 전망했다. 올해 IT섹터에서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휴대폰의 균형 강세가 예상되고 있는데 ‘멀티 플레이어’인 삼성전자는 이 같은 상황에서 수혜를 볼 수 있다는 분석이다. 이승우 신영증권 연구원은 “미국발 경기 둔화 리스크는 여전하지만 휴대폰 및 LCD의 선전으로 1ㆍ4분기 실적은 물론 중장기적으로 삼성전자의 경쟁력은 더욱 강화될 것”이라며 “현 주가가 주가수익비율(PER) 10~11배 수준으로 밸류에이션이 낮다는 점 역시 매력적”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2004년 사상 최대치 실적을 기록한 이후 줄곧 하향세를 그려왔다. 2004년 12조원 영업이익 달성 이후 2005년 8조원, 2006년 6조9,000억원, 지난해엔 5조9,000억원대에 머물렀다. 그러나 지난 수 년간의 IT업계에서 펼쳐졌던 이른바 ‘치킨게임’이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치열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삼성전자의 실적은 좋아질 여지가 많다는 게 증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송종호 대우증권 연구원은 “특검 수사가 마무리되면 반도체, LCD 등 조 단위로 들어갈 설비투자에 대한 구체적인 전략이 가시화되고 해외업체들과의 비즈니스 관계 역시 재개될 것”이라며 “장기적으로는 그룹 전체의 지배구조 변화 가속화에 따라 삼성전자에 대한 지분 강화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고 이는 자연스레 주가 상승과 연동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급 안정도 매력= 과거 국내 자산운용사들의 펀드운용 기본전략은 일단 삼성전자를 베이스로 깔고 그 뒤에 다른 종목 편입을 고민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지난해 깨졌다. 삼성전자를 덜 가지고 있을수록 펀드 수익률은 높아졌다. 미래에셋의 삼성전자 외면은 이를 더욱 부채질했다. 올해는 상황이 달라졌다. 한 자산운용사의 주식운용본부장은 “3년만에 삼성전자를 살 이유를 찾았다”고 말했다. 지난해 시장을 이끌었던 중국관련주들이 잇따라 추락하고 IT주들의 주가방어력이 돋보이면서 삼성전자를 사지 않고는 못 배길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 자산운용사는 이미 지난해 11월부터 삼성전자의 편입 비중을 천천히 높여 왔다. 또다른 자산운용사의 최고투자책임자(CIO)는 “그간 삼성전자는 실적도 나빴지만 외국인들이 유동성 마련을 위한 수단으로 쓰인 측면이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지금처럼 종목별, 업종별로 변동성이 제각각인 마당에서는 결국 대표주에 투자하는 것이 벤치마크를 따라갈 수 있는 가장 쉬운 수단”이라며 삼성전자의 매력을 꼽았다. ◇차세대 성장동력 확보 못해= 그러나 일선 기관 투자가들이 삼성전자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보는 건 아니다. 모 투자자문사 대표는 “지금으로선 사는 게 맞지만 1년 이상 갖고 있을 지에 대해선 여전히 의문스럽다”고 말한다. 삼성전자가 미래 성장동력 창출에 대한 숙제를 근본적으로 풀지 못한 상황에서 관련 업황호조만으로 기업 가치가 지속적으로 상승하기엔 덩치가 너무 커졌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삼성전자는 반도체, 휴대폰, LCD에 이어 전세계적으로 시장을 창출할 차세대 성장동력을 아직 찾지 못했다. 기술은 끊임없이 진보하지만 그렇다고 이익이 끊임없이 진보하는 건 아니다. 지난 10여년간 컴퓨터 속도가 수백배, 수천배 빨라져도 가격은 오히려 떨어지는 게 IT업체의 기본 한계다. 최근 미국의 금융위기가 진정됐다고는 하지만 뒤이어 몰아 닥칠 실물경기 침체가 어느 수준일 지는 그 어떤 전문가도 쉽게 전망하지 못하고 있다. 선진시장 소비의 침체는 ‘프리미엄’ 삼성전자에게 치명타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머징마켓의 수요가 변화의 중심축으로 작용할 것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당장 선진시장 수요를 감당할 거라고 말하는 건 지나치게 낙관적인 기대다. 최근 시장의 대표적 비관론자인 이종우 교보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중국의 내수소비가 커질 것이란 분석에 “말도 안 된다”고 말한다. 이 센터장은 “지금 중국의 소비력이 미국ㆍ일본 등 선진국의 8%에 불과한데 단기간 내 컨슈머 사이즈가 커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분석했다. 김세중 신영증권 투자전략팀장은 “원자재가 상승과 인플레이션 압력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봤을 때 전세계의 소비는 필연적으로 줄어들 수 밖에 없다”며 IT에 대한 지나친 낙관론을 경계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애널리스트는 “후진국이 10%씩 성장하는 것과 선진국이 성장률 1%를 올리는 건 차원이 다른 문제다. 삼성전자 역시 이젠 과거와 같은 성장을 하기엔 덩치가 너무 커져 버렸다. 지금은 삼성전자가 진정한 세계기업으로 가느냐, 그냥 한국의 대표기업으로 남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소니가 지지부진하고 모토롤라가 꺾인 것은 이 숙제가 얼마나 어려운 지를 말해준다”고 삼성전자의 현실이 만만치 않음을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