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8년 12월 한국오라클 사장에 취임한 유원식(57·사진) 사장은 당시 대표실을 가득 메운 축하 난(蘭) 100여개를 모두 1개당 1만원에 팔겠다고 직원들에게 알렸다. 축하 난을 돈 받고 판매한다는 소식에 직원들은 당황했지만 금방 숨은 뜻을 이해했다. 난 판매금을 곧바로 난치병 아이들의 소원을 실현해주는 비영리재단 메이크어위시에 전액 기부하며 유별나게 나눔 동참을 이끌었던 유 사장. 지난해 6월 돌연 한국오라클 대표직을 내려놓은 그가 9개월 만에 민간 국제구호단체 기아대책의 새 지휘관으로 변신했다.
지난달 기아대책 6대 회장으로 취임한 그는 최근 서울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인생 후반전에 나눔에 열정을 쏟을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며 "34년간 기업에서 터득한 경영 노하우를 비정부기구(NGO)에 적용해볼 것"이라고 소감을 밝혔다.
기아대책이 기업 최고경영자(CEO) 출신 인사를 회장으로 선임한 것은 설립 26년 만에 처음이다. 그만큼 유 회장도 기아대책 조직문화에 새 바람을 넣고 싶은 욕심이 크다. 그는 취임하자마자 직원들에게 '처음으로 돌아가자'고 주문했다. 그는 "비영리 조직이다 보니 민간 기업과 비교해 속도·효율성이 떨어지는 면이 있다"며 "대신 NGO로서의 나눔과 섬김 정신을 다시 무장시켜 직원들이 성취감을 얻도록 하고 싶다"고 말했다.
유 회장이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 것도 열정 때문이다. "처음에는 아내가 많이 말렸습니다. 그동안 쌓아온 경력과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지요. 하지만 목표 성취 후 식어버린 열정을 평소에 관심이 많았던 나눔과 봉사에서 되찾고 싶었습니다. 흔한 말로 '지옥 같은 천국'을 떠나 '천국 같은 지옥'을 선택한 셈이지요."
유 회장은 1981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후 한국휴렛팩커드에서 21년간 근무하고 2002년 한국썬마이크로시스템즈 대표, 미국 본사 부사장에 이어 2008년부터 한국오라클 대표를 맡았다. 외국계 정보기술(IT) 수장을 두루 거친 그가 돌연 사장직을 내려놓은 것은 50대 중후반 더 늦기 전에 인생 2막을 시작해야겠다는 결심 때문. 미국 본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후임 사장 인선까지 마무리한 후 회사를 나왔다.
그는 "CEO 출신 선배들이 자신들은 그런 용기가 없었다며 응원해줬다. 사회에서 쌓은 경험과 지식을 나눔에 써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동안 대표직을 수행하면서 난치병 환아의 소원을 들어주는 단체 메이크어위시와 장애인 재활을 돕는 단체인 세계밀알연합회 이사를 맡아 난치병 어린이, 장애인들을 돌봐왔다.
그는 기업의 사회적책임(CSR)에 대해 "기업은 영리 추구를 우선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 충족된다면 사회적 책임도 감당해야 한다"며 "특히 CEO는 직원들이 나눔을 실천할 수 있도록 시간을 내주고 관심을 갖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지난해 개인·기업 후원금, 정부 지원금 등으로 기아대책이 펼친 사업비는 줄잡아 1,300억원을 넘는다. 그는 "지속되는 불황으로 기업 후원금도 늘지 않고 있지만 각계에서 보내준 정성이 새지 않고 어려운 곳에 구석구석 흘러 들어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유 회장은 요즘 취업난으로 희망을 잃은 청년들에게 "한국을 벗어나 글로벌 시장으로 시각을 넓혀 그곳에서 일자리도 찾아야 한다"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나라의 언어·문화를 이해하는 종합적인 의사소통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했다.